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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R Dec 31. 2020

29살 초등 교사가 유학을 떠난 이유

다른 일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더 나은 교사가 되겠다는 것

나는 평생을 한국의 교육 체계 안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해외에서 공부하는 것은 부자들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고, 그렇기에 내 삶은 영원히 한국 안에서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태어난 순간 국적이 정해진 것처럼, 내 미래도 어느 정도는 언어와 국가의 규격 안에 이미 꼭 맞춰져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학창 시절 고등학교 3년 내내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에 맞추어 착한 어린이처럼 공부했고, 우리나라 안에서 좋을 대학을 골라 갔다. 그러니까 대학을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내 인생에 유학이라는 단어는 들어올 틈이 없다고 여겼다.


처음 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20살의 끝자락과 21살의 시작쯤이었다. 당시 우리 학교에서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주립대와 협약을 맺고 방학마다 어학연수 겸 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4주간 이어질 프로그램에는 해당 대학교 캠퍼스 안에서 영어공부를 하고, 샌프란 시스코와 LA, 라스베이거스, 그랜드 케니언 등의 여행 일정도 포함하고 있었다. 영어가 평생의 콤플렉스였던 내게는 어학연수도 미국 여행도 아주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학교 지원금 200만 원을 제외하고도 상당히 큰 금액의 추가금을 지불해야 하는 프로그램이었지만, 하고 싶은 건 뭐든 시켜주는 부모님의 지원 덕에 어려움 없이 나는 해당 프로그램에 참가할 수 있었다.


4주간의 어학연수 끝에 내게 남은 것은 향상된 영어 실력도, 넓어진 문화 간의 식견도 아니었다. 내 마음 한편에 깊이 자리 잡은 유학을 떠나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학생수가 많아야 1200명 남짓이던 교대의 작은 캠퍼스에서 살다가 미국의 주립대학 캠퍼스를 경험해보니 세상은 내가 알았던 것보다 어마 무시하게 넓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고등학생 올챙이 적 공부 좀 했다고 목이 빳빳해져 있던 나는 그 위압감에 한순간에 공손한 어린양이 되었다. 아마 그 순간이 유학을 향한 내 마음의 첫 시작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만 두고두고 아쉬운 점은 그때 당시 내가 너무 어렸었다는 것이다. 미국으로 떠날 당시 나는 무언가를 하러 간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미국 땅을 밟아보는 데 대한 호기심이 컸고, 덕분에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내가 조금 더 똑똑했더라면 그 기회를 토대로 더 이르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을지 모른다.


교사가 된 후 유학을 가겠다던 나의 결심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뒤로 미뤄졌다. 사실 처음 1~2년은 하루하루가 유학에 대한 꿈을 불태우는 나날이었다. 가족과 친구들의 곁을 떠나 타지에서 시작한 교사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어떻게든 잘해 보려는 내 마음은 안중에도 없이 여기저기 일을 치고, 학부모들은 어떻게 하면 교사를 한번 잡아먹어볼까 하는 호랑이 같은 존재들로 느껴졌다. 같은 학교 선생님들은 본인들보다 무능한 신규 교사에는 별 반 관심이 없었다. 주어진 업무들은 단어조차 생소했고, 누구 하나 내가 맡은 업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속시원히 알려주지 않았다. 학교 현장에 나가면 이런 일들을 겪을 거라는 걸 어느 수업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나는 그 속에서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유학을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2년간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오면 아무도 나를 무시하지 못하겠지, 나는 더 이상 무능한 교사가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다.


우리 지역의 경우 교직 경력이 3년이 지난 후부터 유학 휴직을 신청할 수 있다. 3년을 채우자마자 휴직을 내야지,라고 생각했던 나는 힘겨웠던 3년이 지나자 놀랄 정도로 빠르게 현실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어엿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렸을 적 하던 소꿉놀이보다 배는 재미있었고, 내가 겪어온 많은 문제들은 시간이 해결해주기 시작했다. 감당이 안되던 아이들, 어렵던 학부모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었고, 학교 안에서는 마음을 터놓는 선생님들이 생겼다. 업무에 익숙해지는 단계를 지나 나름 특화된 분야를 찾은 나는 일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동기들에 비해 많은 일들을 경험했고 부장도 일찍 달았다. 꾸준히 생활기록부 업무를 하던 나는 근무 지역 내의 생활기록부 점검단 일까지 맡게 되며 업무에 대한 자부심의 정점을 찍었다. 사람의 인정 욕구라는 게 참 무서워서, 작은 학교 안이지만 내가 한 사람 몫 이상을 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곳에 안주하고 싶어 졌다.


유학에 대한 나의 결심을 다시 되찾게 한 것은 생뚱맞게도 어느 날 동생과의 산책에서였다. 늘 그렇듯 산책길을 떠날 땐 가벼운 일상 대화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점점 심화되어 우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번졌다. 당시 대학 병원 면접을 갓 마친 동생은 이야기 중 면접 중 받은 질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롤모델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동생은 '언니'라고 대답했댔다. 정말인지 뜬금없는 고백이었다. 우리 자매는 가족이자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였고 이제껏 누구보다 많은 이야기를 공유해 왔으나, 나는 한 번도 내 동생이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었다. 동생은 내가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으려 열심히 살아온 것이 존경스럽댔고,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본받고 싶댔다. 평화롭던 내 마음에 동생의 말이 울렸다. 현실에 안주하다 못해 이부자리를 깔고 누워있던 머릿속의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래, 나는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사람이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진지하게 유학을 준비하게 된 것은 그냥 때가 되어서였을지 모른다. 교사라는 위치에서 열심히 살다가 일이 년 안에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살아갈지, 근 십 년간 꿈꿔온 일을 실행하기 위해 그간 쌓은 것들을 뒤로하고 유학길에 오를 지에 대한 마지막 갈림길을 선택할 때. 다만 동생의 말이 그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알람이 되어 주었을 뿐이다. 그 대화가 있은 후에도 한동안은 마음 깊은 곳에서 혼자 퍽 많은 갈등을 했다.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내 곁에 있어준 동료 선생님들과 내가 해온 모든 것을 두고 유학을 계획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얼마간의 고민 끝에 나는 8년쯤 손을 놓았던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해외 대학원 입학을 위한 영어 공부가 유학 휴직을 향한 나의 첫걸음이었다.


웃기게도 유학을 가겠다는 마음을 먹자 성격 급한 나는 당장 해외의 캠퍼스에 있고 싶어 졌다. 그러나 유학이라는 게 말로는 한 단어이지만 실제로는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고, 새로운 나라와 공부할 대학을 찾는 등 손이 많이 가는 일이라 결심을 하고도 실제 떠나기까지는 일 년 반 정도가 소요되었다. 공인 영어 점수를 만들고, 대학원에 지원하고, 학교에 휴직을 내는 등 절차를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밟으며 길고 지친 시간을 보냈다. 동시에 할만하다고 여겼던 업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더니 어느 순간 숨도 못 쉬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음과 현실의 불합치가 이어지자 나의 스트레스는 한계점에 가까워지고 내 머릿속의 경고등이 윙윙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울려대기 시작했다. 모든 게 폭발하기 직전, 나는 근무하던 학교를 옮기고 곧 지원한 대학원의 합격 소식을 받을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초등학교 교사가 유학씩이나 갈 필요가 있느냐고 묻고, 또 어떤 이들은 기껏 대학원을 지원해주고 나면 다른 직업을 가지겠다고 도망가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사람의 미래는 모르는 것이니 함부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나는 아직 대학원을 졸업한 후 나를 있게 해 준 교직을 떠날 계획이 없다.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데 '유학'씩이나 필요하냐고 묻는 질문에는, 당연히 '그렇다'라고 대답해줄 것이다. 그리고 되물어주고 싶다. 당신이 교실에 있어 보았냐고. 


교사라는 직업이 그렇다. 초등 교사는 더더욱 그렇다. 몇몇 사람들은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라고 별생각 없이 여기는 것이 바로 교사이다. 그러나 교실에 들어가 보면 곧 본인이 뱉은 말이 큰 실수임을 느낄 것이다. 작은 교실 안은 또 하나의 사회와 다를 바 없어 온갖 문제를 안고있고, 40분간의 수업은 공부 빼고 다 재밌어하는 아이들의 본성과 일어나는 매 순간의 전쟁이다. 이런 현장을 개선하고 더 나은 교육환경을 제공하려면 교사들 역시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하다. 나는 내가 느낀 많은 문제점 중 하나를 선택했고, 이 분야의 식견을 넓히고자 한 것이 내 유학휴직의 또 다른 이유였다. 학생에게 교사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다. 교사가 가진 사고의 깊이와 넓이가 아이들의 세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걸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더욱, 교사들이 많은 것을 보고 느낄 필요가 있다.


나는 이제 처음 유학을 떠난 29살을 지나 30살의 마지막 날에 서 있다.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으나 나는 지금도 유학을 결정한 그 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또한 내가 현장으로 돌아가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자부한다. 나의 글을 통해 또 어딘가에서 유학의 꿈을 꾸는 교사들이 두려워 말고 자신의 꿈을 펼쳐보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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