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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R Jan 03. 2021

첫 발표를 마치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내가 유학 생활 중 기대했던 것 중에 하나는 캠퍼스였다. 교대 캠퍼스는 마음만 먹으면 15분이면 교문부터 제일 꼭대기까지 다 살펴볼 수 있을 만큼 작았던 터라, 나는 유학을 가면 푸릇푸릇한 잔디가 깔린 큰 대학교 캠퍼스를 누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쉽게도 그런 나의 바람은 첫 단과대 방문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라트비아 대학교의 캠퍼스는 리가 곳곳에 단독 건물 형태로 분산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올드타운 근처에 밀집되어있는 다른 단과들이나 국립 도서관 옆에 거창하게 지어진 과학대와는 달리, 교육, 예술, 철학과의 건물은 리가 외곽에 외로이 떨어져 있다. 시내에 있지도, 으리으리하지도 못한 우리 단과대는 그나마도 가려면 기숙사에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하고, 버스는 한 시간에 두 세대밖에 오지 않는 데다 종종 엉뚱한 시간에 도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 과가 좋았다. 나중에는 불만이던 입지도 나름 소소한 재미를 주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2019년 9월 첫 미팅을 가지고 보니, 우리 과는 외국인으로 구성된 6명의 학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교수님 말씀으로는 이렇게 외국인 학생들이 많이 지원한 건 올해가 처음이라 했다. 지금은 모두 소중한 친구들이 되었지만, 이때 당시 나는 이들을 '얼마나 영어를 잘하는나'의 기준으로 보았던 것 같다. 아마 나의 영어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원어민인 에이미는 당연하고, 네덜란드와 독일 출신인 루스와 야스민은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는 대학교를 졸업한 학생들 답게 '내 눈에는' 원어민 수준으로 보였다. 중국인인 빙빙이는 영문학과를 나왔고, 아제르바이잔에서 온 이라나는 영어는 약했지만 대신 러시아어를 포함해 4개 국어를 할 줄 알았다. 그러니까, 그 안에서 나는 난생처음 '네가 꼴등'이라는 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그때까진 괜찮았다. 친구들의 말을 1/3 정도만 알아들을 때도, 가끔 적절한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대화가 듬성듬성해질 때도 나는 여전히 조금은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저 열심히 하면 괜찮을 거야, 라든지 수업 내용을 녹음해서 여러 번 다시 들으면 되지, 같은 식. 


나의 첫 발표는 '우리나라의 교육 체계'였다. 나는 내 첫 발표에 대해서 나름 자신이 있었는데, 이미 6년 가까이 학교에서 일하면서 우리나라 정규 교육 과정에 대해서는 빠삭하기도 했고, 마침 그때 드라마 '스카이캐슬'이 유행하면서 이 드라마와 연관 지어서 입시 제도의 문제점도 설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장장 네다섯 시간에 걸쳐 발표 자료도 만들었고, 기숙사에 혼자 앉아 두어 번 연습을 해보며 '뭐, 이 정도쯤이야.'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내 머릿속은 꽃밭이었다.


내 발표는 가장 마지막에 이루어졌다. 자신만만하게 프레젠테이션을 화면에 띄우고 입을 떼었는데, 내가 생각한 대로 발표가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은 꼬이고, 단어는 기억이 나지 않으며, 나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의 표정에 '?'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며 내 혀는 점점 더 굳어갔다. 모두의 앞에서 내가 얼어붙은 이유는 긴장한 탓도 있었겠지만, 여전히 부족한 내 영어실력과 발표 울렁증이 한몫을 했다. 


대학생이던 시절 4주간 미국엘 다녀왔다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식 영어 교육의 산물이었으며, 그나마 그 안에서도 부진아였다. 강한 한국식 억양에, 고등학생 시절 단어를 쉽게 외우기 위해 내 멋대로 만들어놓은 방식으로 발음하니 영어에 유창한 이들도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게다가 학술적 용어에는 더욱 약해서, 나는 'article'과 'thesis'의 차이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고, 이런 나의 혼란스러운 단어 선택은 듣는 이들을 더 큰 혼란으로 밀어 넣었다. 


여기에 더해 스스로 준비가 잘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이 들거나 큰 부담감에 직면할 때면 상습적으로 몰려오던 발표 울렁증은 나를 패닉으로 몰아넣었다. (발표 울렁증을 가진 교사라니 생각해보면 웃기지만 남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나는 항상 손을 벌벌 떨곤 했다. 신기하게도 수업을 할 때는 예외였다.) 결국 끝을 맺는 둥 마는 둥 황급히 발표를 마쳤고, 내 자존감은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우울감, 좌절, 자기혐오? 하여튼 그 종류의 단어들을 몽땅 합친 것 같은 기분이 몰려왔고 나는 다시 한번 울고 싶었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지키고자 나는 눈물을 꾹 참았다.


다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영어는 내게 영원히 넘지 못할 산이고 여기에 더 있어봤자 졸업은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던 꼴등 생활은 죽어도 못할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도망치듯 교실을 빠져나가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단과대 건물 어딘가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혔다. 조금 숨을 돌리고 보니 또 인생에 이런 일 한 번쯤은 괜찮은 것 같았고, 자기 보호 기제가 발동해 '너희도 한국말로 하면 한마디도 못할 거잖아'라는 못난 생각도 했다. 하여튼 온갖 자기 합리화의 과정을 거쳐 나는 그 엉망진창이던 발표 10분 만에 제법 기운을 회복할 수 있었다.


내 마음이 진정되고 보니 '교수님이 넌 영어를 못하니 그냥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가렴'이라고 말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내 마음에는 무슨 공포가 그렇게 많은 건지. 나는 벌떡 일어나 그 길로 교수님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막상 찾아가서 별 말을 못 하는 내게 교수님은 6개월만 지나면 생각도 영어로 하게 될 거라며 괜찮다며 나를 다독여주셨고, 당시 여전히 낯을 가리던 우리 과 친구들은 내게 사진과 메시지를 보내며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그러나 생각을 영어로 하게되는 꿈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내가 대학원에서 맞이한 첫 시련이었다. 나는 이 위기를 주변인들의 부둥부둥을 받으며 어찌 그 순간을 넘어섰다. 이후에도 매 발표마다 나는 몰려드는 자괴감과 싸워야 했지만 그때마다 나를 옆구리에 끼고 발표 준비를 도와주기도, 아낌없는 조언과 응원을 보내주기도 한 친구들 덕에 어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제는 나름 태연하게 영어로 된 논문을 읽고 조금 엉성하더라도 내게 주어진 발표를 이끌어 갈 수 있게 된 것은 내 공이라기보다는 남의 공이다.


내게 처음 적응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내가 겪어온 것과는 다른 새로운 교육 환경이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영어는 적응하는 데 어려움뿐만 아니라 그냥 인생 최대의 난관 정도의 급이 다른 수준이었으므로 논외로 한다.) 나는 대학교처럼 대학원도 교수님이 새로운 고차원의 지식을 열심히 설명해주는 곳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곳은 뭐든 스스로 찾아서 공부하고 그 내용을 공유해야 하는 새로운 세계였다. 일주일에 한두 개쯤은 꼭 발표와 과제가 있고, 심지어 과제의 주제도 우리가 직접 연구하고 싶은 분야를 찾아서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조금 강의가 이어진다 싶으면, 꼭 '그래서 너는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라는 식으로 내 의견을 물었다. 내 마음속에서는 번번이 '아니 저는 아무 의견이 없는데요.'라는 불평이 솟았지만, 또 묻는 대로 곧 잘 답하는 다른 친구들을 보며 나 역시 황급히 무슨 말이든 해보려 애썼다. 


내 기대치와 다른 데서 오는 어려움도 있겠지만, 나는 요즘 유행하는 MBTI 식으로 설명하자면 모든 성향이 극단적인 ISTJ, 이미 있는 매뉴얼을 따라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을 가장 잘하고 편안해하는 성격이다. 그런 내게 '남들 앞에서 발표하고', '해당 과목의 성격에 따라 내가 관심 있는 주제도 정해야 하며', '자꾸만 새로운 것에 대해 내 의견을 묻는' 이 대학원 생활은 내 성격과는 완벽하게 상반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어찌 적응에 성공했고 벌써 마지막 학기를 바라보고 있다.


라트비아 대학교가 어디 내로라할 만큼 명성이 높지도, 멋진 캠퍼스를 가지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나의 대학교 선택에 있어서 만족하는 이유는 학생에게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주는 교수님들이 있는 공간이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해 준 매개여서다. 지금은 코로나 펜데믹과 교환학생 등을 이유로 뿔뿔이 흩어져 못 본 지 적게는 반년에서 길게는 10개월쯤 되었으나 나는 여전히 교수님과 친구들을 떠올릴 때면 마음이 따뜻해져 옴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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