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트비아의 첫 느낌과 현실적인 생활비
내가 처음 밟은 유럽 땅은 라트비아였다.(환승지였던 러시아는 여러모로 애매하므로 제외한다.) 생후 4개월 때 처음 비행기를 타고 일본을 간 이후로 중국, 대만, 홍콩, 마카오, 베트남, 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온 아시아 국가들을 섭렵하고, 미국 캘리포니아의 여러 도시들을 다녔지만 유럽은 처음이었다. 나 스스로 선택했지만 정작 나도 아는 것이 별로 없었던 곳. 버스를 탔던 새벽 4시쯤부터 라트비아에 도착한 순간까지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했기에 라트비아에 막 도착했을 때 나는 여전히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래서 조금은 기억이 왜곡되었을 수 있지만, 나의 첫 느낌은 '나 여기서 어떻게 살지'였다.
내가 라트비아에서 처음 살기 시작한 곳은 라트비아 대학교의 기숙사였다.(첫 학기 이후 나는 빠르게 그곳을 탈출했다.) 말이 기숙사지, 그냥 저렴한 호스텔과 학교가 계약을 맺어 학생들의 숙소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리가의 노른자 땅에 있는 다른 대학교의 기숙사와는 달리, 라트비아 대학교의 기숙사는 라트비아 사람들도 가기 기피하는 곳에 있다. 리가이지만 리가가 아닌, 따뜻한 프라푸치노 같은 그곳. 그러니까 그곳은 말 그대로 우리가 상상하는 구 소련 시대로 타임슬립 한 것 같은 곳이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점점 기숙사 가까이 가는데, 창밖을 보며 나는 '아, 나 진짜 여길 왜 왔지?'라고 생각했다. 오래되고 다소 음침해 보이는 사각형의 허름한 건물들, 그 주변을 걷는 어두운 표정의 사람들. 그리고 내가 살야 가야 할 건물은 그중에서도 가장 회색빛으로 느껴졌다.(사실 흰색이다.) 어떻게 체크인을 한 지도 모르게 나는 짐을 풀고 그렇게 첫 날을 보냈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라트비아 대학교에서 입지 좋은 땅을 매입해 새 기숙사를 지으려고 첫 삽을 뜬 순간, 성곽 같은 유물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대로 공사는 종료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갈 곳 없는 외국인 유학생들은 모두 호스텔 겸 기숙사 역할을 겸한 그곳으로...
라트비아에 도착한 후 처음 일주일간은 시차 적응을 못해 내 인생엔 없을 줄 알았던 아침형 인간 생활을 하게 되었다. 8월 말의 라트비아는 여전히 여름이기 때문에 날씨가 제법 따뜻하고, 해가 길다. 나는 새벽 네시쯤이 되면 눈을 뜨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로비로 내려가 컴퓨터로 세상과 소통을 좀 하고 여섯 시가 되면 씻고 일곱 시 반이면 기숙사를 나섰다. 내 기숙사가 있는 곳은 여전히 소련 시절이었다면, 라트비아 시티센터는 현실, 올드타운은 별천지였다. 내가 보낸 첫 일주일의 날씨는 온종일 화창했고, 올드타운과 시티센터는 활기가 넘쳤다. 라트비아의 특성상 길 가다 마주친 사람에게 인사를 하거나 스몰 톡을 하는 문화는 아니었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밝고 쾌활해 보였다. 나는 비로소 내가 이 나라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유럽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유럽의 오래된 건물들 역시 처음 경험했다. 내가 처음 한 생각은 '여긴 어딜 가도 예뻐'였다. 라트비아의 한강이라고 할 수 있는 다우가바 강이 올드타운 옆을 따라 흘러가고, 그 옆으로 나란히 올드타운과 시티센터가 위치해 있었다. 둘 사이 한가운데 자유 기념비가 있고, 둘의 경계에는 작은 강을 따라 길게 공원이 조성되어 상반된 분위기를 가진 두 장소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게 했다. 올드 타운이 관광객을 위한 아기자기한 공간이라면 공원을 가로질러 시티센터에 가면 현실을 열심히 살고 있는 라트비아 수도의 모습이 펼쳐진다. 공원을 걸으며 자유 기념비를 바라볼 때, 내가 라트비아에 왔음을 여실히 느꼈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 경험한 유럽은, 반팔 면티에 청바지를 입으면 딱 좋을 온도에 언제나 화창하고, 푸른 나무와 졸졸 흐르는 작은 강이 어우러진 공원을 걷다가 언제든 올드 타운이든 시티 센터든 그날의 기분에 맞춰 골라 갈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곳이었다. (소련 느낌의 충격적이었던 기숙사 기억은 기억 저 너머로 날려버렸다.^^;)
흔히 동유럽권 국가들은 물가가 저렴해 여행하기 좋다고 한다. 유학생에게도 물가가 중요하기는 매한가지다. 오히려 관광객들보다 더 물가에 민감하다. 라트비아의 물가는 어찌 보면 저렴하고, 또 어찌 보면 아니다. 기숙사비는 150유로였다. 한화로 20만 원 정도였는데, 저렴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나중에 따로 집을 구해서 살며 느낀 거지만, 라트비아 리가의 집을 매매하는 건 상대적으로 저렴한데 월세는 비싸다. 흔히 말하는 투룸 형 플랫을 구했고, 월세는 공과금 포함 여름에 500유로, 겨울엔 550유로였다. 한참 유로가 1400원대로 비쌌을 때 나는 여름에 한 달 월세로 70만 원을 지불한 셈이다. 근처에서 매매로 나온 비슷한 조건의 집이 1억 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하니, 매매가 대비 월세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대신 보증금은 1달치 월세와 같은 가격이었다.
외식 물가는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음료에 메뉴 하나쯤 시키면 한화로 20,000원 정도. 우리나라와 비교했을 때 공산품은 수입이 많아서인지 상대적으로 비싸고, 식자재는 저렴하다. 특히 장바구니 물가는 굉장히 저렴해서 당근 하나에 몇십 원을 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수입 농수산물은 제외. 핸드폰 요금의 경우 일주일에 3 유로면 데이터 무제한, 통화 30분, 문자 무제한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한달이면 2만원 안되는 금액으로 무제한 요금제를 사용할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커피 가격은 또 달라서, 코스타 커피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에 3.1유로를 냈으니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준이다.
물가가 다른 EU 국가들에 비해 저렴한 건 사실이었지만, 사용하는 화폐가 원에서 유로로 바뀐 나는 한동안 큰 혼란을 겪어야 했다. 내가 지금 사는 게 상대적으로 비싼 건지 저렴한 건지, 내가 지금 얼마를 지불하고 있는지에 대한 혼란. 천 원, 이천 원이 1유로, 2유로가 되면서 주는 '얼마 안 하네'의 느낌이라면 전달이 좀 더 잘 될까. 덕분에 나는 첫 학기에 내 인생에 다시없을 과소비를 하며 지낸던 것 같다. 돈에 연연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고 싶은 생각으로 온 덕분에 더욱 그랬다. 아마 내가 지낸 곳이 라트비아가 아니라 서유럽권의 어느 나라였다면 나는 벌써 파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늘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다. 나는 항상 운이 좋다고. 무슨 선택을 해도 날 위한 방향으로 술술 잘 풀린다고. 라트비아에서 첫 일주일을 살며 나는 그 말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역시 우주는 나를 위해 움직이나 봐. 아름다운 도시, 완벽한 날씨, 저렴한 물가까지. 내가 이 순간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거구나, 했다. 이후 나는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했지만 누군가 내게 유럽에서 어느 나라가 가장 좋았냐고 대답한다면 나는 '그래도 라트비아!'라고 대답할 것 같다. 처음 그 반짝거리는 느낌은 내 머릿속에 깊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위해 그때 당시 썼던 블로그 글을 다시 살펴보았다. 물론 내가 처음 지냈던 그 기숙사의 시설은 최악이었지만, 또 처음 라트비아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져 나를 행복하게 했다.
다음 글부터는 슬슬 내가 겪은 학교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