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R Jan 05. 2021

나와 친구가 된 첫번째 라트비아 사람

그땐 우리가 친구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해외에서 살게 되면 현지인 친구를 많이 사귀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해외 생활을 영화로 배운 한국 토박이라, 카페에서 공부를 하다 자연스럽게 스몰톡을 나눈 옆자리 사람과도 친구가 되고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비슷한 도서 취향의 사람과도 친구가 될 줄 알았다. (4주간의 캘리포니아 생활도 이런 나의 기대감을 높였었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미 언급했지만 라트비아는 길 가다 마주친 사람과 인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스몰톡을 하는 문화가 아니다. 이들은 남에게 별 관심이 없다. 그러니 생면부지의 외국인인 나에게 하늘에서 뚝 친구가 떨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남은 방법은 과에서 자연스럽게 만난 친구들과 그들의 친구들을 사귀는 것뿐인데, 우리 과 학생들이 모두 외국인으로 구성되어있다 보니 이들 역시 라트비아에 연고가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결국 의지할 것은 서로뿐. 알고 있는 라트비아 사람이라고는 교수님들과, 예전에 한국에서 근무했다던 외교관 올렉스씨, 그리고 루스와 야스민의 홈메이트인 야니스가 전부였다. 


라트비아인 친구가 없다고 라트비아 유학 생활을 즐기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와 과 친구들은 낮이면 모여서 과제를 하고 밤이 되면 다시 만나 올드타운이나 시티센터를 누비며 맥주를 한잔 하곤 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맨 정신일 때에는 다소 소심한 데다가 영어라는 장벽까지 가지고 있던 내게 맥주 한잔은 친구들과 가까워지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맥주 0.5l의 알딸딸함이 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과 친구들과 조금씩 가까워지면서도 나는 여전히 라트비아라는 나라에 대해 호기심이 가득했고, 언제나 라트비아 사람 친구를 사귀고 싶어 했다.


나의 첫 라트비아 사람 친구는 생각지도 못하게 찾아왔다. 라트비아 생활을 한 지 2-3주쯤 되었을 무렵, 나는 우연찮게 라트비아에서 대학 졸업 후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 중앙아시아 국적의 한인 2세 학생을 위해 마련된 송별회 자리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실은 초대를 받았다기 보단 나와 같이 있던 학생이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되며 나도 덩달아 따라가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의 첫 라트비아인 친구, 크리스를 만났다. 실은 그때 당시 나는 크리스와 내가 친구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라트비아에서 국제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에서 대학을 나와 일을 하고 있던 크리스는 나와는 다소 다른 나라 사람 같았고, (물론 실제로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오히려 나중에 크리스가 부른 나의 두 번째 라트비아인 친구인 베아트리스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내가 만날 때마다 'beautiful'을 외치게 했던 바로 그 친구다.)


뒤늦게 참석한 우리를 위해 송별회 자리를 옮겨 간 칵테일 바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락처를 교환했다. 여전히 나는 우리가 나중에 매일 연락하는 친구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대학교 OT자리에서 무작정 연락처를 교환하고 나중에 누구 번호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처럼, 칵테일 한 잔에 힘을 얻은 내가 자연스럽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연락처를 교환하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와 크리스는 친구가 될 운명이었는지, 또 어찌 만남을 이어나갔다. 나와 크리스의 두 번째 만남은 한국인 유학생의 집에서 열린 추석 디너파티였다. 그날 송별회에 초대를 받았던 사교성 좋은 그 유학생은 칵테일 바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추석을 맞이한 디너파티를 제안했고, 지나가는 말인 줄 알았던 그 이야기가 현실이 된 것이다. 그 자리에는 우리 과 친구인 루스 역시 참석했고, 사회성이 차고 넘치는 루스와 한국인 유학생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던 나는 정신을 차려보니 크리스와 성큼 가까워져 있었다.


물론 단 두 번의 만남으로 크리스와 매일 연락을 할 정도로 가까워진 건 아니었다. 나는 운이 좋았다. 주변의 사교적인 친구들이 모두가 함께 있는 단톡 방을 만들어 매일 떠들고, 멋진 바를 찾아냈을 때, 펍 퀴즈에 참여할 때, 수업과 과제로 지친 하루를 보낸 뒤 맥주 한 잔을 할 때에도 모두 크리스를 초대하며 여러 번 시간을 함께 한 후 이젠 매일 연락하는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었다. 크리스의 존재는 내게 연고 없는 곳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함께하는 주변인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기회가 계기가 되었달까. 이제 나는 많지는 않아도 몇몇 라트비아 사람 친구를 가지고 있다. 물론 모두 크리스에서 출발한 지인들이다. 우연한 기회로 가까워진 친구 한 명이 내 유학 생활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정말인지 나는 무모하고 겁이 없었다. 매 순간 '운이 좋았다.'로 설명되는 일이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 타지에서 아는 사람 없이 외로운 싸움을 이어나가야 했으니까. 운이 좋게 내가 지원한 해에 많은 외국인들이 지원해 과 친구들을 만났고, 운이 좋게 한국인 교환 학생들과 좋은 인연을 만들었으며, 운이 좋게 라트비아 사람 친구도 만들 수 있었다. 내가 이 날까지 무사히 공부를 이어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운이 좋은 덕이지만, 또 매 순간 내 눈앞에 펼쳐진 운을 잡아챈 건 나였으니 내 노력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뒤늦게 시작한 유학 생활이란 건 이런 게 아닐까. 전혀 새로운 곳에서 새 시작을 하는 일이기에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펼쳐지지만, 매 순간의 기회를 잡고 좌절을 보내주는 것은 본인의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라트비아에서 만난 한국인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