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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R Jan 12. 2021

숟가락만 얹은 라운드 트립

너는 따라오기만 해

어떤 이들은 유럽으로 유학을 가면 주변국을 열심히 여행 다니는 꿈같은 생활을 할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상황이 받쳐줄 때의 이야기다. 첫 학기의 나는 영어와 새로운 교육환경이라는 장벽에 막혀 여행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가끔 4-5일씩 이어지는 휴일이 있기도 했지만 그 날은 내게 과제를 많이 하는 날들이었다. 수업이 있는 날은 수업 듣고 과제하는 날.


앞으로 2년을 유럽에 있을 거니 여행은 나중에도 할 수 있다는 안이함과, 라트비아에 대해 특별히 아는 것도 없으니 가고 싶은 곳도 없다는 무지함 덕에 라트비아 외 여행도 라트비아 내 여행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누가 계획은 다 짰으니 너는 따라오기만 해, 라는 상황이 오지 않는 이상 학기 중 여행은 어림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너는 따라오기만 해'.

같은 대학교 같은 과를 졸업한 루스와 야스민은 이미 라트비아를 오기 전부터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아우르는 발트 3국 여행책을 구매한 상태였다. 독서를 좋아하는 이들은 이미 그 책을 주파하고 가고 싶은 라트비아의 도시를 모두 선정한 후였고, 차량 렌트와 예약할만한 숙소까지 확인한 후 에이미와 내게 함께 갈 것을 제안했다.


솔직히 말하면, 가고 싶지 않았다. 라트비아의 소도시들이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아직도 충분하지 않은 내 영어실력으로 이틀간 원어민들 사이에 끼인 외로운 한국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볼게-'라는 말로 우선 시간을 벌고 고민을 본격적으로 해 보려는데 루스는 이미 완성된 루트를 동영상으로 찍어 여기에서는 뭘 할 거고, 저기에서는 뭘 할 거고, 라는 말로 나를 꼬드겼다. 결국 나는 아는 것 하나 없는 나라로 유학을 결정했던 용기를 동원해 라운드 트립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이제까지 나에게 여행이란 비행기를 타고 찾아간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 어딘가를 돌아다니며, 남이 해준 맛있는 음식을 먹고, 호텔에서 자는 거였다. 대학생 때는 다들 장롱면허라서 라운드 트립을 계획할 만한 상황이 안되었고,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에 '여행'은 '해외여행'을 뜻하는 말로 통용되었으니까. 친구들과 렌트한 차를 타고, 에어비앤비에서 구한 아파트에서 자고, 식사도 직접 준비해먹고 가끔은 쫄쫄 굶다가 길 가에 앉아 마트에서 산 빵을 뜯어먹는 라운드 트립은 처음이었다. 차 한 대에 친구들끼리 옹기종기 앉아 한 명은 운전을 하고 나머지는 끊임없이 수다를 떠는 그런 낭만적인 여행. 


흙먼지를 뒤집어쓴 차에 스마일을 그려주었다. 저 스마일은 이틀 간 우리와 함께했다.


나름 운전 경력 1년, 큰 사고 경험 1회를 자랑하는 나였기에 돌아가면서 기사 노릇을 하려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렌트한 차는 수동이었다. 친구들에게 '인터내셔널 드라이브 라이선스'가 있다고 큰소리를 뻥뻥 쳐 놨던 2종 보통의 나는 야스민이 운전해주는 차 뒷좌석에 얌전히 앉아있어야 했다.


이름도 생소한 옐가바, 쿨디가, 벤스 필츠, 콜카, 엔굴스 호수를 보고 리가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존재하는 것조차 몰랐을 도시들을 구경하게 되었다. 아마 나는 라트비아를 구석구석 구경한 몇 안 되는 한국인 중에 하나가 아닐까.


이번 라운드 트립은 구경하는 것조차 이제껏 내가 해온 여행과는 달랐다. 친구들은 뭐든 직접 해보는 걸 좋아했다. 유명한 모래 동굴에 직접 들어가는 체험을 신청해 다 같이 촛불에 의지해 동굴을 가로질렀고, 멋진 다리와 강을 발견하면 샛길을 찾아 다리 밑도 구경했으며, 비에 젖어 미끌미끌해진 나무 데크 위를 걷게 되더라도 국립공원의 전경은 모두 보길 원했다. 바닷가에 쓰러진 나뭇가지에 누군가 허술하게 매어놓은 밧줄로 그네를 타고, 누가 봐도 나무로 뚝딱뚝딱 만든 듯 한 높은 전망대에도 올라갔다. 줏대 없는 나는 엉겁결에 친구들 뒤를 쫄쫄 따라다니며 이제껏 보지 못한 라트비아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학생활은 내게 '처음'의 연속이었다. 처음 해본 것을 하나 끝내고 나면 또다시 처음 해보는 것을 하게 되었다. 나름 각오를 하고 온 유학이었지만 처음 해본다는 생경한 느낌은 겪어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항상 회피하고 싶었던 처음을 경험하고 나면 왜 진작 이걸 해보지 못했을까 하는 감탄이 뒤따라온다.


나는 내가 열려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하나를 겪고 나면 그간 내가 얼마나 편협하게 살았는지를 깨닫게 된다. 교실 안에 있었을 땐 내가 가장 많이 경험하고 많이 아는 사람이었는데, 그 밖으로 조금만 나와보니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를 이렇게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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