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첫 번째 학기를 마무리지었다.
학창 시절에 겪은 어려운 일을 떠올려보면 대체로 두 가지 아닐까. 친구들 사이의 트러블, 그리고 시험기간. 내게도 시험기간은 참 힘든 시간이었다. 특히 나는 중고등학생 시절보다 대학생이 된 후 시험기간을 더 힘들어한 경우인데, 어쨌거나 늘 비슷한 형태의 시험을 보던 중고등학교와 달리 대학교에서는 과목별 교수님들의 출제 스타일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어서 불안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대학생 시절 늘 행복하다가도 시험기간만 되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한 사람인 양 굴었다. 참고로 그렇게 스트레스받아하면서 또 공부를 열심히 한 건 아니었다. 스트레스를 받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학점도 그저 그렇게 되고 그러면 부담감에 그 다음 시험기간에는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서 내게 교사가 되어서 가장 좋은 점 중의 하나가 뭐냐고 묻는다면, 바로 더 이상 시험기간이 없다는 점이었다.
하여튼 이런 내가 유학을 선택해서 자진해서 다시 학생이 되었다. 물론 유학을 준비할 당시 내가 이런 걱정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단지 '열심히 하면 되겠지', '미래의 내가 책임지겠지'라는 무책임한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 미래의 나는 과거의 나를 원망하며 라트비아에서 첫 학기를 무사히 보낸 후 어느 나라에나 있는 시험기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라트비아의 성적 체계는 10점이 최고득점으로 우리나라로 생각하면 A+정도이고, 1점이 최저득점이다. 4점부터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 되어서 다시 시험을 보거나 다음 학기에 그 수업을 다시 들어야 한다. 교대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한 과목이라도 통과하지 못하면 졸업이 불가능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나의 두려움은 더욱 증폭되었다. 나는 무슨 일이든 닥치면 항상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당시 나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학교에서 쫓겨나서 패잔병처럼 터덜터덜 한국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그리고 한국의 학교에 돌아가 '학교에서 쫓겨났어요...'라며 상황을 설명하고 복직을 준비하는 모습. 지금 생각해도 정말인지 끔찍한 상상이다. 하여튼, 이러한 이유로 나는 굉장히 절박했다. 아마 이 당시의 시험기간만큼 내가 유학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내가 유학생활을 상상하며 한 가지 크게 간과한 점이 있었는데, 바로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공부를 하면 휘발성이 상당히 높다는 거였다. 한 문단의 글을 읽어도 영어로 읽은 글은 돌아서면 기억이 나질 않았고, 단어 하나하나는 이해가 가는데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능률은 한국어에 비해 훨씬 떨어졌다. 아무래도 영어 어휘력이 한국어보다는 떨어지다 보니 같은 내용을 공부해도 이해하는 폭이나 다시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랬다. 모국어로 공부를 할 때 '열심히'하면 됐었다면, 외국어로 공부를 할 때에는 '죽을 만큼 열심히'해야 했다.
다행히 마스터 프로그램의 경우 시험을 봐야 하는 과목이 많지 않았다. 대신 과제 반 시험 반 정도로 나뉘어 있었고, 학기 중에도, 학기말에도 꾸준히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에세이를 쓰고, 발표를 준비하고, 그리고 시험공부도 해야 했다. 그러니까, 한국과 다른 점이라면 시험기간에 한 번에 쏟아질 고통이 좀 분배되어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학기 내내 할 일이 있고, 과제 하나를 끝내고 그날 밤 맥주를 마시며 기뻐하다가 다음날 새로운 과제를 해야 하는 날들의 연속이다. 시험기간에는 그저 그 일상에 두세 과목의 시험만 더 얹어진 셈이다.
나는 주어진 시험 범위를 정말 탈탈 털어가며 공부를 했다. 처음엔 시험 범위를 훑으며 모르는 단어들을 모조리 검색해 뜻을 정리해놓고 1차로 내용을 이해했다. 물론 끝나고 나면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2차로 다시 읽을 땐 해당 범위 내용 중 중요한 단어나 문장에 표시를 해 가며 읽었다. 개인적으로 암기가 약한 편이기 때문에 전부 다 외우는 건 불가능했고, 키워드 중심으로 암기한 후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하기로 했다. 3차로 읽을 때면 영어로 읽는대도 속도가 좀 붇기 때문에 훨씬 수월하다. 이 정도는 읽어야 '아, 이 부분의 전체적인 문맥이 이런 뜻이었구나', 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시험을 모두 무사히 마쳤다. 놀랍게도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늘 그랬듯 함께 모여서 공부했던 과 친구들의 도움이 컸었고, 공부가 너무 하기 싫은 날이면 교환학생 동생들을 따라 나가 놀러 가는 비행(!)을 저지르는 즐거움이 그 시간을 이겨내는 힘이 돼 주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시험기간을 나는 벌써 세 번이나 보냈고, 이제는 그 시험기간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마지막 학기를 준비하고 있다.
무슨 일이든 돌이켜 생각할 때면 조금씩은 아쉬움이 남는 법이다. 내가 회상하는 첫 학기도 그랬다. 즐겁고, 좋은 일이 가득했고, 그만큼 고생한 만큼 배우는 보람찬 시간이었지만, 내가 지금 아는 조금의 요령이 더해졌더라면 훨씬 더 효율적인 시간을 보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내가 가는 길은 모두 처음 가보는 길이고, 주변에 이런 것들에 대해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고스란히 부딪혀가며 배워야 했다. 힘들었고, 그래서 더 뿌듯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혹시 나와 비슷한 길을 가고자 하는 다른 분들이 있다면 그분들은 조금이라도 편하게 가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다음 편에는 유학 생활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꿀팁들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물론 나도 아는 게 많이 없어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되어 드릴지는 모르겠지만 ^^; 한 분에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보람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