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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R Jan 11. 2021

코로나 음성 확인서와의 사투

남이 망하기보다는 내가 잘되기를 바라자

나는 정말인지 집요한 데가 있는 사람이다. 온라인 수업을 듣거나 공부를 할 때면 내게도 집중력이라는 게 있을까 싶을 정도로 딴짓을 하느라 바쁘다가, 무슨 일이든 하나에 꽂히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일만 하고 있다. 이럴 때는 배도 안 고프고 화장실도 가고 싶지 않다. 


단적인 예로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 한때 뜨개질에 빠져 있었던 적이 있는데, 어느 날 내가 뜨개질을 하는 실타래의 실이 엉켜버렸다. 이 엉킨 실타래를 푸는 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나는 하루에 1-2시간밖에 자지 않고 수업도 겨우 들어가며 온종일 이 실타래만 붙들고 있었다. 3박 4일의 사투 끝에 나는 결국 패배했고, 승복하는 의미에서 가위로 엉킨 실을 싹둑, 잘라버렸다. 아마 그때 잘라내지 않았다면 한 달 내내 그걸 붙들고 있었을 사람이 바로 나다.


그 집요함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발휘가 되는데, 그 대상에는 규칙이 없다. 가끔은 사람이 되기도, 물건이 되기도, 작은 사건이 되기도 한다.


이번에는 코로나 음성 확인서였다.




교환학생 학기가 마무리되어가며 나는 슬슬 라트비아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돌아가는 비행기를 예약하고, 비행기 시간상 비엔나에서 하루 머물러야 하는 탓에 기차와 호텔 예약까지 바빴다. 그리고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가는데 라트비아에서 불쑥 새로운 제재안을 발표했다. 15일부터 비행기를 통해 입국하는 모든 분들은 72시간 안에 발급받은 코로나 음성 확인서를 제출하세요, 하고. 내 비행기는 18일 출발 예정이었다.


내 생각엔, 이번에 내가 집요해진 까닭은 비행기를 결제하기 전 14일로 할 것인가 18일로 할 것인가 참 많은 고민을 했었기 때문인 듯 싶었다. 고민고민하다가 내가 정말 싫어하는 과목 수업시간과 비행시간이 조금 겹치겠길래 안 되겠다, 하고 18일 비행기를 예약했는데, 이것 때문에 내가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했다. 이놈의 과목은 정말인지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구나, 하는 미움이 더해지니 더 큰 집요함이 만들어졌다. 그것도 엄한 코로나 음성 확인서에게.


나의 분노의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오스트리아에서 병원 한번 가 본 적 없는 데다 독일어는 겨우 이름 말하기 수준밖에 못하는 내겐, 코로나 검사가 가능한 병원을 찾아서 일정을 조율하고 결과까지 무사히 수령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큰 일처럼 느껴졌다. 둘째, 내 비행기는 월요일 아침 출발이다. 말이 아침이지 비행기를 타려면 새벽같이 공항에 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유럽 대다수의 병원에 주말에 근무하지 않을 거란 걸 감안하면 내가 검사를 받을 기회는 금요일뿐이다. 그런데 PCR 검사는 결과가 나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일요일에는 이미 비엔나에 가있어야 하는 나로서는 72시간 안에 받은 결과 확인서를 받을 확률이 매우 낮다. 셋째, 나는 산책과 장보기 외에는 방 밖을 벗어나지 않는, 어쩌면 오스트리아에서 코로나로부터 가장 안전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코로나 검사받기 싫다. 그냥 싫다. 나는 코를 찔리고 싶지 않다.


실은 이 날은 논문 쓰기와 마감 기한이 다가오는 과제 둘 모두를 해야 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코로나 음성 확인서라는 단어와 지독하게 얽혀 들기 시작했고, 이미 과제와 논문은 안중에도 없었다. 전에 없던 집중력으로 영어 안내문들을 읽고 독일어 번역기까지 동원해 우리 도시 병원들의 코로나 검사 시간과 가격, 나오는데 걸리는 시간들을 확인했다. 이제껏 코로나에서 안전했던 과거의 라트비아, 오스트리아에서 코로나로부터 가장 안전한 도시인 클라겐푸르트에서 지내며 코로나나 코로나 검사는 남일인 줄 알았던 내게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오스트리아에서 받을 수 있는 코로나 테스트의 종류는 두 가지였다. PCR테스트와 항원검사. PCR테스트가 정확도가 더 높아서 우리나라에서는 PCR만 시행한다고 한다. PCR 테스트는 결과를 얻는데 빠르면 6시간, 오래 걸리면 48시간 안에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항원검사는 보통 15분 안에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두 검사는 가격도 다른데, 병원 따라 차이는 있지만 PCR테스트의 검사비용은 보통 120유로에서 140유로. 16만 원 중반에서 18만 원 후반 정도 하는 가격이었다. 항원검사는 비엔나 거주민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해주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받을 경우 25~50유로 안에서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3만 원 후반-8만 원 정도로 PCR보다 훨씬 저렴하다. 코로나 음성 확인서를 요구하는 나라들 별로 항원 검사를 인정해주는 나라도 있고 해주지 않는 나라도 있는데, 라트비아의 경우 '음성 확인서'라고만 했지 검사 종류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덕분에 지식은 늘었으나 여전히 답을 찾지는 못한 나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금요일에 우리 도시에서 PCR테스트를 받아서 일요일 아침까지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였다. 비행기 시간으로 인해 하루 머물러야 하는 비엔나 병원들의 운영 시간을 조사했다. 일요일에 검사를 해주는 병원들로 1차 걸러내고, 검사 결과를 24시간 이내에 받을 수 있는 병원들을 다시 걸러냈다. 최선의 선택은 6시간 안에 나오는 병원을 찾는 건데, 그런 완벽한 병원은 없었다. 다행히 비엔나 공항에서 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이것 역시 시간이 좀 애매했다. 만약 라트비아에서 PCR 검사 결과만을 인정해준다면 나에게 최선의 방법은 전날인 일요일 일찍 비엔나로 이동해서 결과가 일찍 나오는 편인 공항 검사를 이용하는 것이 최선인 것으로 보였다.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별 특별할 것 없는 방안 1, 2, 3을 뽑아내고 나서야 나는 조금 평화로워질 수 있었다. 물론 그 긴 사투 끝에 나의 하루는 저물어가고 있었고, 저 방안이라는 것도 결국 선택할 수 있는 병원 목록과 시간 정도뿐이었다. 그리고 저 과정을 수행하는 내내 나는 스트레스를 받고 근거 없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어디에 쏟아야 할지 몰라 계속 '이건 모두 망할 놈의 코로나 음성 확인서 탓'이라고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에서 얻어맞는 건 늘 내쪽이었다. 모든 과정을 끝내고 나니, 후련하기보다는 속이 상했다. 내가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감정에 휘둘려 엉뚱한 데 시간을 모두 써버렸다는 사실이 자각되기 시작했다. 코로나 확인서는 여전히 제출해야 했고, 과제와 논문은 진전 없이 남아있었으며, 나 혼자 하루를 잃고 지쳐서 헐떡이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번에도 나의 사소한 감정에게 완벽하게 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코로나 음성 확인서는 남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또한 나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는 걸. 모두가 조금씩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준비한 코로나 음성 확인서가 또 누군가를 구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하루 온종일 이 선량한 코로나 음성 확인서에게 으르렁 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왜 나는 엉뚱한 것을 집착하고 미워하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는 걸까. 민낯을 들어낸 나의 이기심이 부끄러워지고, 이제까지 내가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애먼 데 한눈팔다가 그르친 모든 일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몰려들었다. 


항상 스스로에게 부탁하는 것이 있다. 남이 망하기보다는 내가 잘되기를 바라자고.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에 집중하자고. 이미 보았듯 내가 코로나 음성 확인서에 분노하는 것은 허공에 발길질을 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고, 아무리 미워하고 망하길 바래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나는 내가 가진 시간을 소중히 쓰고 내 감정을 보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나의 마음은 손에서 놓친 풍선처럼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갈 때가 있다. 특히 나쁜 감정은 내 안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면서 날 헤집어놓고, 엉뚱한 곳에 힘을 빼게 만든다. 


나의 감정은 분노, 집착, 슬픔의 과정을 걸쳐 비로소 일상의 궤도에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의 하루를 잠식했던 집요함에서 벗어나고 나니 조금은 평화로워지고, 나는 이미 잃은 하루에 대한 후회를 하기보다는 이를 통해 앞으로 더 잘 살아갈 방법을 찾는다. 




코로나 음성 확인서를 통해 내게 생긴 좋은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내가 비행기 날짜를 늦게 골랐지만, 나 말고 누군가가 그 자리를 샀을 테니 나는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주었다. 공항에서 나는 더 안전할 수 있다. 내가 낸 돈은 누군가의 경제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오스트리아에서 병원도 가볼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 검사도 인생의 경험이다. 나중에 호호 할머니가 되면 아이들에게 재밌는 옛날이야기를 해 주는 데 한 소잿거리가 되어 줄 것이다. 영어 문서를 많이 읽어서 내 영어 읽기 실력에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브런치에 글도 한 편 썼다. 


알고 보니 끝도 없이 좋은 것이 코로나 음성 확인서 제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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