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는 나를 싫어해?
보통 아침에 맞춰서 글을 올리는 걸 좋아하는데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왜냐하면 드디어 라트비아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1년 살았다고 라트비아에 오니 집에 온 것 마냥 마음이 편안하다. 클라겐푸르트 기숙사가 불편했던 것도 아닌데 라트비아에 오자마자 마음이 놓이는 걸 보면 내가 정서적으로 라트비아를 정말 가깝게 느끼는구나, 싶다. 유럽에서 유럽으로 이동한 거고 비행시간은 2시간밖에 안되었지만, 내가 느끼기로는 한 3일간 이동만 한 것 같다.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오스트리아에서 라트비아로 돌아오기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내 비행기는 오스트리아 시간으로 18일 아침 9시 25분이었다. 라트비아가 오스트리아보다 시간이 1시간 빠르기 때문에 비행시간은 2시간이지만 도착 예정 시간은 12시 25분이었다. 문제는 내가 살고 있던 도시인 클라겐푸르트는 비엔나에서 기차로 4시간 정도 떨어진 지역에 있고, 첫차를 타고 가도 비엔나 공항 도착시간이 9시 초반대여서 전날 비엔나에 미리 가있어야 했다는 거였다. 게다가 나는 72시간 이내에 받은 코로나 음성 확인서도 필요했고, 클라겐푸르트에서 주말 중 검사를 받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17일 아침 일찍 비엔나에 도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15일까지 시험과 보고서가 있었기 때문에 과제들을 끝내고 16일 하루 종일 짐을 싸고, 그 와중에 또 마지막으로 호수를 보고 싶어서 산책을 다녀왔다. 이불과 베개 등도 다 챙겨가야 했기 때문에 17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짐을 마저 싸기로 마음먹었다. 16일 저녁 자려고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안길래 그냥 밤을 새우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16일에서 17일 사이에 잠을 자지 않고, 17일 새벽 4시부터 이불 등의 짐을 다시 싸기 시작했다. 문제는 짐을 싸고 마지막 정리를 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었다는 거였다. 나는 기숙사 근처 정류장에서 5시 30분에 도착하는 첫차를 타고 기차역에 가야 했는데, 짐을 정리하고 방을 나설 때 시간을 확인해보니 이미 5시 15분이었다. 걸어서 5분 거리의 정류장이지만 20kg짜리 캐리어 두 개에 노트북이 들어있는 백팩, 우산까지 챙겨서 가려면 넉넉잡아 10분은 걸릴 거리였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내 방은 2층이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이때부터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20kg짜리 캐리어 두 개를 한 번에 옮기는 건 당연히 불가능해서 질질 끌다시피 해서 하나씩 일층으로 옮기고, 열쇠를 반납하고 기숙사 정문을 나서니 18분... 혹시나 버스가 일찍 올까 봐 두려움에 떨며(해당 버스를 놓치면 기차도 자동으로 놓치는 거였다.) 캐리어를 끌었다. 당시 바깥 온도가 -12도였는데, 추위를 느낄 새도 없었다.
다행히 첫 차에 탑승하는 데 성공했고, 터미널에 도착하니 38분쯤이었다. 기차를 타려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 정도 올라가서 해당 정류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1.5층을 내려가야 했는데 여기서 또 문제가 생겼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문이 닫치고 내려가는 게 아니라, 문이 닫혔다가 다시 열리기를 반복했다. 몇 번을 씨름한 끝에 결국 엘리베이터 타기를 포기하고 다시 캐리어 하나를 들고 내려오는데 저 멀리 기차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다급한 마음에 기차를 기다리던 어느 아저씨께 도와달라고 소리쳤더니, '지금 기차 들어오는데?'라고 하면서도 재빨리 올라가 내 짐을 내려주셨다. 연신 '당케'를 외쳤더니 아저씨는 별일 아니라는 듯 유유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 떠났고, 나도 근처에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영하의 날씨에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기차가 30분 정도 연착되긴 했지만 무사히 비엔나에 도착했다. 내가 예약한 호텔은 기차역에서 3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우선 찾아가 짐을 맡기고, 코로나 검사를 받으러 갔다. 지난번 글에서 설명한 적이 있듯 antigen test와 PCR 두 가지가 있는데, 보통은 PCR 음성 확인서만을 인정해주지만 라트비아의 경우 antigen test 음성 결과도 인정해주기 때문에 저렴하고 결과도 15분이면 나오는 antigen test를 받았다. 결과는 당연히 음성이었고, 비용은 카드로만 지불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래간만에 국민은행 체크카드를 사용했다. (내 라트비아 카드는 12월에 만료된 상태였고, 친구 집으로 새 카드를 배송시켜놓은 상태였다.)
돌아오는 길에 점심을 테이크 아웃해 호텔로 돌아오니 직원이 내 방이 준비되었다며 일찍 들어 보내 주었다. 덕분에 나는 방에서 편하게 식사를 하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깨어나서 보니 8시-9시쯤이었다. 라트비아에 입국하려면 48시간 이전에 인터넷으로 관련 서류를 작성해 제출하고 큐알코드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그 작업을 마무리하고, 비행기 체크인을 한 후 비행기표도 출력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했기 때문에 저녁을 챙겨 먹고 씻고 다시 잠이 들었다.
18일 아침 6시에 다시 눈을 떴다. 6시 42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지을 꽉 차 있는 캐리어는 손도 대지 않았기 때문에 작은 짐들만 마저 챙기고 체크아웃 후 공항으로 향했다. 내가 탄 기차 칸 안에는 나밖에 없었다. 비엔나 공항에 도착해 보니 상당히 큰 공항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많지 않았다. 보통은 유럽에서 유럽으로 이동하는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한 승객들만 있는 것 같았다. 공항에 도착해 체크인 카운터가 열리기를 앉아 기다리면서 뒤늦게 알게 된 것이 있는데, 바로 내 음성 확인서가 독일어로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순간 사색이 되었는데, 라트비아인 친구에게 이야기했더니 괜찮다고 했다. 관련 링크를 보내주어서 확인해보았더니,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로 되어있는 음성 확인서를 모두 인정해준다고 되어있었다. 상황에 따라 리투아니아어와 에스토니아어도 된다고 한다.
체크인 코너에 가 보니 가장 먼저 신분증을 확인하고, 곧이어 음성 확인서를 요구했다. 어떤 식으로 검사할 것인지에 대해서 상당히 궁금했는데, 음성 확인서를 보고 오스트리아에서 발표한 코로나 테스트 가능 기관에서 받았는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내 결과지가 PCR이 아니라 antigen인 것을 보고 어딘가로 전화를 해서 가능한지 물어보길래 긴장했는데, 다행히 무사히 통과였다. 수화물을 맡길 때 보니 내 캐리어들 무게가 21. kg, 20. kg (소수점은 기억이 안 난다.)였는데 둘 모두 무사히 통과시켜주었다.
비엔나에 왔으니 마지막으로 꼭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 가고 싶었는데, 비엔나 공항 내 스타벅스는 문을 열지 않은 상태였다.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코로나로 인해 일시적으로 운영을 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꾸벅꾸벅 졸다가 라트비아에 도착했다. 라트비아에 도착한 후에도 한번 더 음성 확인서 검사와 큐알코드 검사가 이어졌고, 영국발 입국자들은 코로나 테스트를 한번 더 받아야 했기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확인한 후에야 출국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미리 친구가 마중을 나와준 덕분에 집으로 오는 길은 훨씬 수월했다.
이제부터 나는 열흘간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 실은 자가격리는 처음이라서 규정을 살펴봤는데, 놀랍게도 나는 산책을 나갈 수도 있고, 마트나 약국에도 갈 수 있다. 우리나라와는 확실히 자가격리의 개념이 다른 것 같다. 산책도 가고 마트도 갈 수 있다면 자가격리가 아니라 평소와 똑같은 일상인 것 같은데... 하지만 자가격리가 아니래도 지난 3일 간 긴장해 있느라 했던 마음고생, 라트비아에 도착하기까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캐리어들과 씨름하느라 한 몸고생 덕분에 한동안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못 나갈 것 같다. 자체적으로 한국식 자가격리를 하게 될 예정이다.
써놓고 보니 또 별일 아닌 것 같지만, 나는 라트비아에 도착하기 전까지 지난 며칠간을 정말 앉으나 서나 라트비아까지 찾아갈 걱정으로 보냈다. 실은 라트비아가 갑작스럽게 음성 확인서를 모든 사람에게 (라트비아 국민들도 라트비아에 들어가려면 음성 확인서가 필요하다.) 요구한 덕분에 조금 더 복잡해진 것도 있었다. 보통 다른 유럽 국가들은 쉥겐 지역 내 이동의 경우 음성 확인서를 요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무사히 집에 도착하고 보니 내가 얼마나 라트비아를 그리워했는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여전히 어깨와 팔, 등 부위 근육이 아프고 짐은 절반도 못 풀고 널브러져 있다.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한동안은 가만히 집에 칩거하며 지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