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내 감정에 집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나는 위로에는 영 자신이 없었다. '힘내' 라던가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은 왠지 너무 상투적이고 성의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썩 훌륭한 대안책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래서 위로를 해야 할 상황이 오면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곤 했다. 여전히 나는 위로에는 소질이 없지만, 그럼에도 나이를 먹고 사회생활을 하고 많은 이들을 만나다 보니 위로에도 요령이 생겼다.
내가 찾아낸 방법은, 위로를 하며 지금보다 더 상황이 좋지 않았던 내 경험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남자 친구 문제로 속을 썩이던 친구에게는 네가 얼마나 가치있는 사람인지 이야기하는 와중에 내가 만났던 더 별로였던 남자 이야기를 끼워 넣었다. 학부모나 학생으로 속을 썩이는 친구가 있으면 네가 얼마나 좋은 선생님인지 이야기해주면서 내가 학교에서 학부모나 학생에게 겪은 더 괴로웠던 경험을, 과중한 업무로 힘들어할 때면 잘하고 있다고 기운을 북돋아주며 내가 가장 업무가 많았던 시절 이야기를 덧붙였다. 내가 겪은 고통이 이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랬고, 실제로 이것은 백 마디 '힘내'나 '너는 잘 이겨낼 거야'같은 말보다 백배쯤 효과가 좋았다.
안타깝게도 나를 위로할 때 가장 효과적이었던 방법이기도 했다. 내 마음이 정말 힘들 때면,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괜찮은 사람인지를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도 고생하고 힘들어한다는 것을 느꼈을 때 더 안심이 되었다.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내가 이상한 게 아니구나를 확인하고 위안하고 싶어 했다. 이런 게 사람의 본성인지 아니면 내가 타고난 인성이 고작 이것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안심하고 나면 내면의 추한 면을 엿본 것 같아 씁쓸했다.
힘들고 지친 사람에게 본인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그 사람을 걱정하고 있는지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위로 방법이다. 그러나 또한 가장 들리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귀를 막고 고통에 잠긴 이들은, 힘든 현실에 대한 원망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린다. 남들은 다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내가 이상해서 이렇게 힘든 거라고, 스스로를 원망하고 자책하며 그 상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위로 방법은 너만 힘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 때문이 아니라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참 슬픈 위로법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그리고 상대적인 동물이다. 그래서 종종 행복에 대한 오류를 저지를 때가 있다. 돈을 얼마나 벌든 더 많이 버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초라하게 느껴지고, 내가 이룬 성취는 더 많은 것을 성취했다는 사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 내가 무엇을 가졌는가 보다는 남이 얼마나 못 가졌는가가, 내가 얼마나 행복한가 보다 남이 얼마나 불행한가 가 나의 삶의 만족도를 판단하는 더 중요한 기준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내 행복에 집중하며 살기로 했다. 당장 쉽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나만 생각하며 살아볼 생각이다. 남의 것을 부러워하거나 남의 위기에 위안하기보다는 온전히 나 자신의 성취와 감정에 집중하며 살아갈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