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자란다

그때, 그때의 그때

by 아무튼 간호사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월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4월은 가장 잔인하다면서 기껏 하루 차이로 오월은 푸르르고 어린이를 위한 나날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어른들의 미래, 나라의 보배이자 희망이라며 기념일로 만들어주신 방 선생님께는 직장인이 되어서야 감사드릴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늘, 어린이가, 오월이, 뭐 어쩌라고.


언젠가 5월 첫 주에 비즈니스 미팅이 있었다. 온갖 기념일로 교통 혼잡하고 식당 예약 어려운 줄 모르고 굳이 한국에 오겠다는 독일 사람 몇 명, 그네들을 위해 분주했던 어느 사월은 잔인함 따위 생각할 겨를 없이 그저 바빴다. 한국의 5월 5일은 어린이날, 휴일이기에 공식 일정은 없다는 말을 들은 그들은 신기해했다. 그들의 나라(뿐 아니라 많은 영어권 국가들)에서 어린이는 365일 항상 보호하고 늘 인격적으로 대해야 하기에 특별한 날을 정하지 않는다는 논리가 부러웠다. 게다가 그들은 Lady 역시 늘 보호해야 한다며 제일 분주한 나를 챙기려 들어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의 사장님을 곤혹스럽게 만들었고 나에겐 젠틀맨으로 남아있다. 그중 한 명의 젠틀맨이 나의 어린이날은 어떠했냐며 묻기에 주저 없이 일 년 중 제일 신나는 날이었노라 말했다.


사실은 그렇다. 내가 어린이였던 그때, 어린이날은 내게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한 번도 어린이날이라며 선물을 주시지도, 행복한 기억을 심어주지 못하셨다. 그렇지만 우리 집은 왜 선물이 없냐며 묻지도, 무얼 사달라고 떼쓴 적도 없는 걸 보면 어릴 때 나는 무척 속이 깊었다고 할까? 고단한 부모님의 생활을 일찍 알아 채 버린 어린 어른이었던가.

아니면 절대 괜찮지 않지만, 이유를 알게 되면 더 상처받을까 남몰래 닫아버린 마음을 안고 살았는지 모른다. 요즘 드는 생각이지만 이미 지난 그때 떼도 써보고, 울기도 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심리적으로 안정되었을 것 같다.


내겐 언니가 여럿 있는데 나만 굉장히 여리고 복잡하다. 부모님은 난생 겪어본 적 없는 어린 나를 키우느라 애먹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기질적으로 유난스럽고 섬세한 나를 부모님은 의도치 않게 심리적으로 방치시켰을지 모른다고 여겼다. 그러니 유독 나만 결핍을 느끼는 거라며. 언니들과 대화해보면 그녀들의 어린 시절은 행복했다고 한다. 억울하게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외로웠던 기억,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눈물로 떠나보낸 기억이 많기에 불행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행복하지는 않았다.


내 어린 시절이 얼마나 심심했고 때로는 슬펐으며 상처로 남은 지 이제껏 누군가에게 말해본 적이 없다. 귀하게 자란 척 연기를 했고, 상처 없이 맑은 사람인 듯 유치하게 굴었다. 그래서 그런지 스무 살 넘어 꾸준히 연애하며 어린이날에는 선물을 꼭 받았다. 연상은 물론이고 동갑내기와 연애할 때조차, 그 아이는 어린이날, 더 이상 어린이일 수 없는 내게 "우리 어린이! 오늘은 무슨 선물 사줄까?" 하며 귀여워했다. 행복한 어린이가 아니었음을 그간 만나온 속 깊은 그들은 짐작했을까? 아니면 전혀 몰랐을까? 내 오랜 친구들에게조차 어릴 때 기억이 이리 불우했다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어린이날 선물이, 그날의 따뜻한 추억이 없는 것이 부끄럽다. 그래서 내가 불쌍해지는 것이 싫다.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는 나로 살아가고 싶지만 꾸며놓은 이상과 현실 속의 간극이 너무 깊어 괴리감에 힘들어한다. 말로 쉽게 할 수 없을 정도의 힘든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그 아픔 그대로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라 한다. 만일 이 공간에 소리 없이 말해버리면 아픔이 좀 더 줄어들까. 치유받을 수 있을까.


유난히 물음이 많은 글이다.


내 인생에 진짜 어린이였던 시기보다 더 긴 세월을 누군가를 통해 어린이날을 보상받고 있다. 이 자리를 빌려 그들에게 감사를. 무엇보다 그 시간을 꿋꿋이 견뎌온 내게도 위로를.


그리고,

지금 글을 쓰며 깜짝 놀랐다. 지금껏 도대체 어린이가 뭔데 오월 전체를 기념하는지, 노래 속의 맥락이 무엇인지 의아했는데 사실은 이러했다.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올해는 아주 특별한 선물이 도착했다.

깊은 우울함과 외로움으로 가득 찬 내 방의 어둠을 밝혀 줄 초롱불(랜턴이지만ㅋ)을 보내 깜짝 놀라게 한 "Tom"에게 이 자리를 통해 다시 한번 감사를.

때때로 악몽으로 시달리는 나를 지켜주는 곰돌이 그리고 등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