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랑

그때, 그때의 그때

by 아무튼 간호사

느닷없이 나타나 나를 툭 치고 달아나는 기억들.


이를테면 그는 나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그토록 깊은 눈빛을 보일까?


오후의 나른함을 못 참겠다며 입사 동기인 그녀는 불현듯 내게 이상형을 묻는다. 뜬금없는 질문에 한참을 고민하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딱 하나로 범위를 좁혀준다. 그 질문에는 진지할 필요없이 바로 답할 수 있다. 중저음의 목소리, 적지 않은 머리숱, 가벼워 보이지 않는 유머러스함 등을 제쳐두고 ‘눈빛’은 압도적인 영순위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올해 목표가 연애하기 아니었어?”

한마디 던지며 컴퓨터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아니 맞다. 사실 초조하다. 모두의 얼굴이 마스크로 가려져 눈만 보이는 이 시국을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다.

열여섯 때 좋아한 상대가 내 평생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 있다.

근거 없는 헛소리로 가볍게 넘길 이 말이 사실이 아니면 내 인생의 절반 이상 도무지 설명이 안 된다. 나 자신도 납득할 수 없다.

하필 그때 나는 열여섯이었고 위태롭고 혼란한 정신세계를 그저 사춘기로 뭉뚱그려 포장해버리는 어른들이 싫었다. 늘 나 혼자 진심이고 애태우는 마음이 지겹다며 결국 놓아버리는 짝사랑에 지칠 때였다. 그 순간 그는 내 인생에 찬란하게 등장했다.


쉽게 부서질 것 같은 내 마음을 섬세하게 읽어주는 그의 취향은 살면서 접해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우리는 자주 베토벤의 ‘비창’ 같은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에 감동했고, 미학이나 형이상학에 관심을 쏟았다.

무엇보다 크고 맑았던 내 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는 그의 깊은 눈빛이 좋았다.

달빛, 봄빛같이 빛을 내는 아름다운 것에는 환하고 따스한 기운이 담겨있다. 눈빛만으로 아우라가 느껴지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눈빛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누군가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담겨있다고 한다. 내가 눈빛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때부터 그래 바로 이 사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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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겨우 중3이던 나에게 너무 일찍 왔고, 어렸던 만큼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었다. 헤어져도 괜찮은 척했다. 어른 흉내를 내는 친구들을 유치하다며 내심 비웃었는데 사실 내가 그랬다.


열여섯에 누군가를 많이 좋아했던 마음은 아직도 불쑥 찾아와 감정을 휘저어 놓는다. 그때마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는 그 문장을 떠올린다. 그와 닮은 누군가를 깊이 만나기도, 때로는 그와 전혀 다른 사람과 오랜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잊혀지지 않는 눈빛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랑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이유에 이렇게 핑계를 댄다.


더 이상 맑을 수 없는 내 눈을 거울에 비춰본다. 여전히 순진하고, 어리석은 내가, 그만큼의 인생이 빼곡하게 담겨있어 눈을 감아버린다.

차라리 다시 태어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