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알파이며 오메가

시작의 끝

by 아무튼 간호사

이봐요. 그래. 쓸데없이 잘생긴 당신 말이야. 밤하늘에 떠 있는 멀쩡한 달이 무너지고 있다는 생각 해본 적은 없는지.


우리가 만나는 날에는 둥글고 예쁜 달이 우리를 자주 따라다녔다는 걸 기억하고 있을까? 그게 한두 번은 아니었는데. 천체망원경으로 목성의 고리라도 봐야겠다는 너의 바람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결국 우리 둘 다 좋아하는 홀스트의 주피터를 선곡해 함께 듣기도 했잖아. 그날이 너와의 마지막인데 벌써 그 일이 어제가 되고, 생생한 감정조차 흩어져 갈 때, 올려다본 하늘에서 내가 무얼 발견했는지 말해볼게. 밤하늘 아래 가장 밝은 달이 야윈 얼굴로 무너지고 있는걸 넌 아마 못 봤을 거야. 혹시라도 봤다면 허무하게 무너지는 달처럼,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시간이 서러웠을까? 너도 울었을까?

『눈물을 참는 방법』

보고 싶던 너를 만나기로 한 며칠 전, 대학생이 질문하면 주로 초등학생이 답한다는 녹색 창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검색해 봤어. 바보 같은 질문에도 답을 달아주는 착한 어린이가 아직 많아 조금 놀랍더라. 친구들이 써준 답안과 내 생각은 이래.

일 번. 날 울게 만들 상대의 눈은 절대 보지 않는다.

: 눈 마주치지 않기는 좋은 방법이야. 나도 알지. 가급적 인중을 보라고도 그러더라. 하지만 너희는 나를 잘 모르니까. 난 그 사람의 눈빛을 가장 좋아해. 노력해보겠지만 아마 힘들 거야.

이 번. 천장이나 하늘을 바라본다. 안구의 움직임은 이미 나온 눈물을 중력에 의해 눈물샘으로 들어가게 만든다.

: 너 정말 과학적인 근거 기반으로 설득할 줄 아는 똑똑한 어린이네. 어렵지 않으니 이건 꼭 할게.


삼 번. 야한 생각을 한다.

: 예전처럼 밖에 나가 망아지처럼 뛰어놀지 못해서 일까. 유튜브 때문인가. 확실히 요새 친구들은 나때랑 많이 달라. 그래도 속는 셈 치고 해 봐도 나쁠 건 없겠다.

사 번. 숨을 참고 구구단을 외운다.

: 답글을 초등학생이 달아준다는 게 사실이라니... 초딩다운 발상이지만 가장 신선했어. 기억해 놓을게.

오 번. 입술을 꽉 깨문다.

: 입안 가득 피맛이 날 때까지 해봤는데 나한텐 효과가 없어.

마지막. 참지 말고 흘리세요. 눈물을 흘리면 신경전달 물질인 어쩌고 저쩌고가 정신건강에 오히려 도움이 됩니다. 당신의 생명은 소중합니다. 우울증, 자살 예방 상담 전화는 1393

: 이 답글을 달아준 너는 분명 어린이는 아닐 텐데 알다시피 이건 최악

난 못 미더워하면서도 며칠을 연습했어. 슬픈 영화를 보며, 비극적인 책을 읽으며 착한 친구들이 알려준 네 가지 방법을 복습했지. 이제는 실전만 남았을 뿐.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두 가지 이유는 내가 울면 못 생겨지니까. 울고 있어도 예쁜 영화 속의 여배우처럼 아련해 보이지도, 그래서 안아주고 달래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테니까. 표정은 일그러지고 콧물이 줄줄 흐르는 추한 모습이 네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라니. 이건 너무 싫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너는 내가 울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잖아.

근데 말이야. 네 마음을 알면서도 언젠가는 나의 안부를 묻는 너의 전화에 ‘네가 나라면 어땠을 것 같니’라며 가시 돋친 말을 떠올렸어.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화가 나. 화가 난 내가 싫어져 울먹였고 너는 결국 물었지.

“무슨 일 있어?”

“슬픈 일이 떠 올라서”

“무슨 일인데?”

“난 네가 슬퍼”

지나고 보니 그런 모진 말을 했더라. 내가 울면 마음이 아프다는 네게 슬픈 이유가 너라고 말이야. 이 말을 듣고 내게 처음으로 물어본 바보같은 말을 기억해.

“만약 네 인생에 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너는 좀 더 행복할까?”

난 대답하지 않았어. 그럴 수가 없으니까. 행복할지 불행할지 전혀 상관없는데 내 인생에 네가 등장하지 않는 가정 따위 할 수 없다는 걸 넌 모르지 않을 텐데.

우선 나는 열여섯 살에 영화관까지 가서 ‘러브레터’를 보지 않았을 거야. 우체통 앞에서 네 답장을 마냥 기다리는 시간조차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하지 않겠지. 성인이 되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는 날, 그날을 위해 괜찮은 사람이 되려 최선을 다할 리는 더욱 없을 거고. 이 정도면 사약이라고 할 수 있는 에스프레소를 마실 이유도, 남해도 다녀오지 않은 내가 남미까지 갈 필요는 더더욱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 이 나이가 되어 눈물 참는 방법 따위를 물어볼 까닭은 없단 말이야. 너는 조금도 모르는 걸까? 너로 인해 많이 울고, 그만큼 또 웃었고 더 잘 살고 싶어 졌다가 죽고 싶은 이유가 너이기도 했다는 걸. 그러니까 네가 없었다면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이 되어있겠지.

보고 싶던 너를 만나는 날의 목표는 오직 하나. 절대로 울지 않기.


그날 달이 밝기 전까지 꽤 많은 고비가 있었다는 걸 너는 몰랐으면 해. 오랜만에 떠올리는 구구단은 효과적이었지만 이내 나는 왜 11단 12단 이상을 외우지 않았을까 후회했어. 어려울수록 눈물을 참기는 쉬웠을 거라며. 보름달이 떠 있는 거리를 걸으며 네게 이쯤에서 헤어지자 했어. 더는 무리였거든. 기어이 너는 더 멀리 나를 바래다줬고 야한 구구단을 외우며 밤하늘을 보고 숨을 참았어. 네 인중조차 보지 않았는데 끝내 눈물이 후드득. 악수는 상대의 눈을 보며 하라고 들었는데 눈물로 가득 차 네 눈을 볼 수가 없었어. 내가 그리 좋아하던 네 눈빛을 말이야.

어쩌면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알파이며 오메가인 너에 대한 기쁨과 슬픈 기억의 시작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