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쏘다
다급히 구급차가 지나간다. 그 안의 누군가가 부디 살았으면 한다. 혹시나 이런 마음이 저승사자를 언짢게 한다면 그에게 소중한 사람, 그를 사랑하는 이와 이별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주셨으면 한다. 작별 인사 없는 이별은 남겨진 이에게 너무 큰 슬픔이 되니까.
병원과 닿아있는 학교에서 4년, 졸업 후 학교 옆에 있는 그 병원에서 4년을 일했으니 내 20대의 8할이 하나의 지점으로 연결되어있다. 그보다 길지 않지만, 전국의 대학병원을 수시로 드나드는 제약회사에 다녔고 현재의 직장 역시 대학병원과 도보 10분 거리에 있으니 난 "병원"이라는 장소에 꽤 오랫동안 묶여있다. 혹시 그간 내가 본 구급차를 숫자로 헤아려볼 수 있을까? 아픈 사람은 항상 있고, 간호사였고, 약 팔러 다니던 약장사였으니 그곳에서 자주 마주치는 구급차를 진지하게 생각할 이유가 혹은 어떤 감정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작년 언젠가는 무언가를 하고 싶지도,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는 나날을 보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날 역시 앰뷸런스를 지나치는데, 끝내 내가 그 선택을 하게 된다면 저 차를 타고 어느 병원에 가겠지 싶었다. 그날 이후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죽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고 때로는 미친 것 같아서 죽을 것 같았다.
내가 아는 가장 응급한 상황임에도 꾸역꾸역 출근했고, 저녁이 되면 집에 왔다. 가족 누군가에게 말하면 입원시킬까 봐 실은 너무 걱정할까봐, 나를 오랫동안 봐온 원장님과 상담 선생님에게만 죽고싶다고 말할 수 있었다. 공기 중에 떠다니던 그 단어는 끝내 나를 울게 만들고, 먹던 약의 수를 늘렸으며 가능성을 알 수 없는 약속을 하게 했다. 진료가 끝날 때면 원장님은 몇 번이나 나를 믿는다며 다음 주 이 시간에 꼭 오라고, 아니 힘들면 매일 와도 된다고 했다. 상담 선생님과는 상담받는 기간 동안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썼고 그 언저리 즈음 위태로워 보이는 내게 누군가는 1393. 당신은 소중합니다 라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당시 심리검사에서 내 우울함의 정도가 한국의 우울한 사람 전체를 100명으로 가정할 때 2등이라 했으니 내가 감당할 정도의 크기를 넘어서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4개월 과정의 호사스러운 취미 활동을 일시불로 결제하며 내가 이 과정의 마지막 날을 보낼 수 있을까, 없을까 궁금해했다. 내 방에 틀어박혀 하루에 스무 번은 넘게 울었던 날도, 진지하게 유서를 쓰기도 했다.
그런 날이 분명 있었는데 바닥을 치고 나니 아주 천천히, 정말 너무나 서서히 나아졌다. 감사하게도 주변의 많은 이들이 나를 살리려 했다. 모두 다 살리고 있는데 내 안의 다른 나만 홀로, 나를 죽이려 하니 그 '나'가 나쁜 사람이고 그렇게 죽는 내가 피해자라는 누군가의 말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지난한 시간이 이렇게 흐르고, 4개월 과정의 트레바리 모임 마지막 날, 결국 나는 울었다.
지금 3월, 봄은 멀리서 오고 있지만, 여전히 패딩을 입고 출근한다. 회사 동료는 구석진 창가에 미니 철쭉을 여러 개 진열해 놓았다. 키가 작은데도 잔가지마다 꽃망울이 많아 야무져 보인다. 혹시 내년에도 꽃을 피울 수 있냐는 내 말에 "며칠 지나 꽃이 피고, 지면 곧 죽어요" 찰나를 위한 개량종이라고 한다. 그 대답에 나는 잔인하다고 했던가, 슬프다고 했던가.
지금 창가엔 예쁜 꽃이 피어 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꽃이 지지 않았으면 한다. 여전히 하루에도 한 번 이상 구급차를 보면서 나는 당신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바란다.
우리 생은 단 한 번 꽃을 피우고 끝나버리는 화분과는 당연히 다르고, 꽃을 피우든 피우지 않든 사실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으며 어느 날 꽃이 져도, 가지가 힘없이 늘어져도 기다리면 조금 더 버티면 푸르른 잎을 내보이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이고 어느 누구도 이 명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극한의 시기를 겪는, 사는게 버거운 누군가가(과연, 지금의 방문자 수 추이로 볼 때 그럴 일이 있을까 싶지만)혹은 언젠가 내가 이 글을 다시 찾는 어느 날의 나에게 꼭 하고 싶은 말.
당신은 살아야 할 이유가 충분히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