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보고 싶어 그랬어

그때, 그때의 그때

by 아무튼 간호사

그의 일상이 되어버린 작은 공간에 여자가 잠시 머무른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있지만 한참이나 말이 없다.

남자와 여자는 조금 전까지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했고 늘 그랬듯 카페로 향했다. 사람들의 와글거리는 소리가 입구까지 밀려 나왔다. 남자는 소란스러움에 고개를 저으며 거리에서 멀지 않은 그의 사무실로 앞장서 갔다.

가만히 세어보니 삼 년 만의 만남이다. 기약 없는 그 시간 동안 여자는 긴 이별을 하고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중이다. 여자의 마지막 기억보다 남자는 근사해졌고, 변함없는 취향인 좋은 향이 나는 향수를 쓰고 있었다.

침묵을 깨려 남자는 여자에게 어떤 커피가 좋을지 물었다.

“에스프레소”

라고 짧게 대답했다. 여자의 선택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남자는 커피를 내오며

“에스프레소라... 왜지?”

남자는 특유의 진지하면서도 장난스러운 말투로 되물었다.

사실은 보고 싶어 그랬다. 큰 잔에 가득 담길 아메리카노를 조심스레 넘기는 몇 번의 순간을 줄여 남자의 얼굴을 더 깊이 바라보려 했다. 두 모금 정도 되는 쓰디쓴 음료를 마시면 좀 더 어른스러워 보일까. 여자는 아직도 이 사람을 많이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고요함에 갇힌 남자의 공간은 시간이 더디 가는 듯하지만, 커피는 식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곧 남미로 여행 갈 거라고 말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다.

“그동안 남해는 다녀왔고?”

여자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함께였던 그때, 여자는 남해에 가보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기억을 잊지 않고 물어보는 남자의 다정함에 오랜 시간 얼어있던 여자의 마음 한구석에 금이 갔다. 아니 해빙이었다. 몇 년 전, 남자와 멀어지며 유난스러운 한 때를 보낸 여자는 감당할 수 없는 공허함을 그대로 얼려버렸다. 차갑고 무거웠던 마음 한 조각이 남자의 말 한마디에 통째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 만남에 적당한 핑계가 있던 여자는 말했다.

“한국보다 남미는 많이 위험하니까, 혹시 영영 못 보게 될지 몰라서”

작은 에스프레소 잔을 두 번쯤 기울이는 동안 여자의 마음은 결국 넘쳐흘렀다. 어쩌면 울었는지 모른다.

“건강히 잘 다녀오고”

남자의 친절한 당부가 여자에게는 메아리치듯 이명처럼 울려댔다.

서울에서부터 꼬박 하루가 더 걸려 도착한 곳은 브라질이었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시내는 이국적인 향기와 깊은 커피 향으로 채워져 있었다. 농후함이 담긴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자연스레 여자는 커피를 좋아하는 남자를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절대로 구할 수 없다는 커피 가게 주인의 설명에 여자는 홀린 듯 생두를 사서 가방에 넣었다. 배낭이 금방 무거워졌다. 짧지 않은 일정의 남미 여행을 생두와 시작한 것이다. 언젠가 남자의 커피잔에 담길 그것은 여자와 함께 브라질의 장엄하던 이과수 폭포를, 아르헨티나의 아련한 탱고 선율을 들었고 칠레의 안데스산맥을 지나갔다. 페루의 마추픽추에서는 불가사의함을,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에서는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지는 풍광에 반했다.

여자는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금방이라도 다시 볼 줄 알았던 남자와의 만남은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주 먼 곳에서 여자와 함께 온 커피는 향기를 잃어가고 있다. 여자는 더 이상 에스프레소를 마시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