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너의 안부

그때, 그때의 그때

by 아무튼 간호사

언젠가 그대가 오타루에 간다면 해질녘 운하를 천천히 지나는 유람선 안에서 누군가든 무엇이든 추억하며 잠시 기대어 있길 바란다. 운하를 따라 길게 서 있는 조명에 비쳐 반짝이는 물결과 쓸쓸하게 멀어져 가는 지는 해를 바라보는 순간이 있기를 기대한다.

영화 <러브레터>의 배경이 된 홋카이도의 작은 도시 오타루는 나에게 반짝임 그 자체다. 온 세상 경계가 없어질 정도로 푹신한 눈이 쌓이는 겨울은 자연스레 시린 눈으로 걷고, 날이 따뜻해져 얼었던 운하가 녹아 만들어 내는 잔물결은 눈부시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 비로소 깨닫는 것들이 있다. 영화 <러브레터>의 동명이인인 소년 이츠키가 소녀 이츠키를 향한 마음이 그러했고,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여자 이츠키가 남자 이츠키를 기억하며 알게 된 그녀의 마음이 그랬다. 내게는 아스라이 기억 저편에 접어놓은 Y와의 추억을 꺼내어 본 그날이 그렇다.

기억 속의 그때 나는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며 친구들과 무리 지어 깔깔대며 웃는 걸 좋아했다. 도서관 도서대여 카드에 이름을 적으며 아는 이름이 나오면 반가워하던 지극히 평범한 시간이었다.

어느 가을날, 우연히 만나 알게 된 Y와 손편지를 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 보내온 편지에 가슴 뭉클한 영화를 봤다며 <러브레터>를 추천했다. 어리던 나는 영화를 봤지만 그저 새하얀 눈밭과 “잘 지내고 있나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라는 대사만 기억했다. 어느새 여름 방학이 되어 Y를 다시 만났다. 새로운 친구들과 바빠진 생활에 활기차 보이는 Y는 <러브레터>를 보았냐고 물었다. 나는 잘 지내고 있는 Y의 모습에 심술이나 보지 않았다고 했다. 쏘아붙이는 듯한 내 대답을 들은 Y의 서운함 가득 찬 표정을 보고도 못 본 척 지나쳤다.


시간이 흐르고 Y와의 연락이 뜸해질 무렵, 무더위를 피할 수 있는 여행지로 홋카이도를 선택한 것은 우연이었을까?

오타루가 <러브레터>의 촬영지임을 알게 된 것은 삿포로를 향하는 비행기 안 여행안내 책자에서다. 기사에는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낭만적이고 가슴 아픈 영화로 <러브레터>가 소개되어 있었다. 나는 갑자기 오타루에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삿포로에서 기차로 1시간 즈음 걸려 도착한 여름의 오타루는 청량했고, 운하를 따라 걸으며 자연스레 Y를 떠올렸다. 한국에 돌아와 다시 찾아 본 영화 <러브레터>와 그의 편지는 나를 그 시간으로 데려갔다. 닿을 수 없어 알지 못한 Y의 마음과 많은 감정은 뒤섞이어 한동안 나를 아프게 했다. 너무 늦어버렸지만 이제서야 소중한 기억으로 남은 그에게 고마워하며 너의 안부를 마음속으로 불러본다.


“잘 지내고 있나요?
저는 못 지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