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2024년 4월 20일 씀.
이 글은 섬세한 감수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한 사람의 감정으로, 마음을 잃어버린 분들 특히 우리의 희망인 젊은이와 의료진에게 전하는 긴긴 편지입니다.
몇 해 전, 구체적으로 2021년 11월, 스무 해 넘도록 저를 지켜봐 주신 가장 소중한 분께 마지막 부탁을 했습니다.
"제가 죽어도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많이 슬퍼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끝이 없는 우울증이었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 정도로 아파했으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 위해 무던히 애썼는데 불구의 감정이 영원하다면 차라리 스스로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혹시나 기적이 일어난다면’라는 어려운 명제를 증명하는 일이 무의미했습니다. 정신이든 신체든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병이 깊은 환자는 결국 생을 마감한다는 차디찬 믿음이 있었어요. 오만이며 착각이죠. 저는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명랑했고, 아픈 이에게 연민을 느끼는 심성을 가졌는지도, 어쩌면 안아주는 이 하나 없는 불쌍한 이웃을 돕지는 않고 속만 상해하는 감상주의자일수도 있어요. 허무한 결말로 치닫고 지독하게 되풀이되는 현실에 다시 상처 받기 싫었습니다. 네, 한때 저는 대학병원 중환자실 간호사였어요.
넉넉치 않은 시골 형편에도 서울의 번듯한 사립대를 보내신 부모님은 막내딸을 끔찍이 여기셨습니다. 가족들의 전적인 관심으로 부족함 없이 간호대학을 졸업했고 자대 병원에 입사했어요 규모나 의술 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에요. 4년 남짓 근무했고 우울증을 진단받은 건 그로부터 한참 지나서 입니다. 어느 겨울에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까지 저를 살리려 했지만, 끝끝내 유서를 썼고 서글퍼 울먹였어요. 그런 찰나 저의 소중한 분에게서 온 전화를 받으며 앞선 말을 했고요. 미안해하지 마라. 슬퍼하지 마라. 그런데 진짜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날 이후 평범한 시간이 흘렀고 지금 제가 여기 있어요.
탄핵 반대를 외치며 만 스무 살도 안 된 대학생이 광화문 아스팔트 바닥에서 촛불을 들었습니다.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가 이렇게 지켜낸 대통령이에요. 아끼는 딸이 혹여 다칠까, 세상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험한 일이 생길까 너무 열심히 행동하지 않기를 바라셨어요. 가족들이 알면 걱정하니 촛불집회 후 이곳저곳을 남몰래 다녔습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관한 대학 언론인 민주주의 배움터에 자주 나가고 신촌의 이한열 열사 기념관도 다녔어요. 그해 5월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무거운 마음에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른한 봄바람이나 맞으며 화사한 청춘을 보낼 수 있던 때에 내게 민주주의가 무엇이며 민주화 운동이 어떤 의미가 될지 순간에는 몰랐어요. 내 영혼이 찬란했던 시기입니다.
언젠가부터 지나온 날의 나를 외면했어요. 푸르른 스무 살, 특별하고 특이한 것을 가까이하는 나는, 나의 고귀한 친구들은 잘 모르는 신기하고 강력한 사상에 빠져 그것을 깊이 탐하기도, 과거의 기억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졌나 생각했죠. 정의와 평화에 대한 순수한 동기가 있었음에도 유행을 따른 것으로 여기며 마음을 닫고 17년을 보냈어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일관성 없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촛불집회마다 하필이면 선두에서 행동하는 지성인이라 자만하던 그날들로 아무런 이득을 얻지 않았는데 기회주의자 같았습니다 저는 17대 대통령 선거에 투표하지 않았어요. 18대도 안 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도 나가지 않았죠.
2007년 5월 병원 입사 후 많은 것이 멈춰버렸습니다. 모두에게 그러했지만, 특히 나에게 차갑고 모질어 저런 무자비한 인간에게 무얼 배워야 하나, 닮기라도 하면 어쩌나 고민하게 만든 선배가 있었어요. 업무나 지식을 가르쳐 주기보다 남을 괴롭히려 출근하는 것 같았죠. 비슷한 시기를 앓던 친구들과는 ‘태워도 타지 않는 젖은 낙엽이 되고 싶다’며 자조 섞인 말로 위로했습니다. 손석춘 선생님이 내게 직접 해주신 “눈 맑은 젊은 벗의 아름다운 삶을 기원합니다”라는 당부 말씀을 묻어버리고 <신규 간호사 적응 기간>을 인내했어요. 그 시간을 적응이라는 단어로 불러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물 밑에서 부단히 발을 구르지만 우아해보이는 백조 같았죠. 저는 그랬어요. 대학병원 간호사로 살며 화장실 갈 시간, 물 한 모금 못 마실 만큼 바쁘던 날에는 나 자신에게 더 혹독히 굴었고 무수한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이런 현실도 익숙해지고 일 잘한다는 칭찬을 듣기도 하며 비상할 수 있을 때 병원은 나를 주저앉혔어요. 저는 나를 필요로 하고 환자를 돌보는 일에 만족하며 지냈어요. 그러다 환자가 죽는 몇 번의 의료 사고가 생긴 그날들에 책임 간호사로 일했다는 사실만으로 나를 몰아세우는 권력과 마주해야만 했어요. 힘 있는 자들의 뻔뻔스러움이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스스로 강해져야 했고 싸워야만 했어요. 업무 시작하기 전, 어느 날은 일을 마치자마자 삼교대 일정에 맞춰 전 QI 사무실로 찾아가 무고함을 증명하는 일이 반복됐죠. 역겨웠어요. 저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 빤히 보이는데 아무도 보호해 주지 않았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당시엔 울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어요. 부당함을 표현하려면 찢긴 상처를 마주해야 하는데 생존 앞에서 오직 나만을 지키는 내게 그건 못할 일이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분노와 무기력감은 사라지지 않고 어느 날 찾아와 저를 망가뜨렸죠. 그런 것 같아요. 두 번째가 항상 어려웠어요. 일의 성격은 전혀 다르지만, 힘을 쥔 자에게 다시 한번 더 공격을 받으니 공허해졌습니다.
반짝 빛이 난다는 스물다섯 스물여섯이 행복하지 않았어요. 버티는 것조차 힘겨웠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늘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했고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제가 누구를 지킨다니요. 중환자실 간호사로 일하며 며칠이나 담당한 환자분이 해준 말씀이 기억나요. 앉아있을 틈없이 종종거리며 점심 끼니라도 챙기면 오히려 황송하던 때, 중환자실에 누워있던 환자분은 내게 “밥은 먹고 일하셔야죠. 이러시면 안쓰러워 제가 다 미안하네요” 2011년, 병원을 그만두고 나오며 거기서 겪은 대부분의 일을 잊은 채 살았어요. 퍽 늦었지만, 이제라도 떠오른 그 말이 많이 고맙습니다. 저를 깊이 생각해 준 따뜻한 분들이 계셨기에 징글징글했던 시간을 4년이나 버틴 것 같아요. 영악하고 못된 인간들에게 고통받던, 당시 제 체중이 40킬로그램 언저리였는데 누군가를 지킨다는 건 너무도 가혹하죠. 노무현 대통령은 참으로 이상한 분이에요. 그에게는 사람이 사람을 일방적으로 좋아하게 만드는 아우라가 있어요. 수시로 재고 따지는 우리를 순식간에 무장해제 시켰어요. 그를 따르면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 될지 모른다는 착각을 일게 했습니다.
2009년 5월, 그리도 무심하고 쓸쓸히 가버리셔서 많이 속상했을 텐데 제대로 추모하지 못했어요. 영영 떠난 그를 보내지 않았고 애도하지 않았습니다. 찾아보니 전국에는 335곳의 분향소가 마련되었고 500만 명의 조문객이 다녀갔다 해요. 그의 영결식과 노제가 생생히 방송되어도 차마 보지 못했고 그곳에 가지 않았어요. 당신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이들이 하루아침에 애끓고 울부짖는 모습에 아마 코웃음 쳤는지도 모릅니다. 완벽히 고쳐지면, 나 하나로 온전해지면, 정말로 괜찮아지면 그때 충분히 슬퍼하겠다고 미뤄두었어요. 현명하지 못한 결정이었어요. 그런데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갔네요.
제 곁에서 긴 시간 저를 지켜준 분으로부터 사랑이라는 진심을 깨닫고 나서야 2024년 3월, 저는 우울에서 벗어났어요. 비로소 졸업입니다. 17년이 걸렸어요. 터널 끝에는 약속처럼 광명이요 모든 게 환해졌습니다. 도무지 답을 낼 수 없는 질문에 내가 죽어야 해결될 거라 자신했지만, 아니었어요. 내 마음 힘든 것 말고는 숱한 것을 단절하고 건조하게 버틴 시간이 길었어요. 분명 기쁘고 행복한 추억도 많지만, 어두운 감정이 사라지니 노무현 대통령을 잠시 그리워해도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염치없어도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려 24년 5월 23일 그분의 15주기 추도식이 있는 봉하마을에 갑니다. 무척 많이 울 것 같아요. 소란스러운 이별을 하면 치유될 수 있을까요? 상처받은 영혼의 치유는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고 하는데 또 기대하게 됩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언어에는 혼이 담겨 살아 움직여요. 곰곰이 살펴보니 몇 년 전 제가 한 말이 떠올랐어요. "미안해하지 마세요 슬퍼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날엔 몰랐는데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글이었어요. 슬퍼하지 마라. 미안해하지 마라. 2009년 당신을 잃고 한 번도 기억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믿고 살았는데, 그래서 더 미안했는데 아니었어요. 그분의 글귀는 뇌리에 박혀 제가 가장 힘들 때 저와 함께였습니다. 가끔씩 우리는 자기가 아는 슬픈 단어를 꺼내놓아 비참한 마음을 보여줘요.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이토록 아픈 말로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를 베었어요. 여기에 우리는 할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를 먼저 버렸고 그것도 모자라 참 많이 가르고 기어코 끔찍하게 무너뜨렸어요. 그는 진심을 다해 "그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라며 2002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외쳤어요. 누군가를 버린다는 말이 그분에게 어떠한 무게를 지닌 단어인지 알 것 같아 얼마나 아팠는지 몰라요.
봄처럼 따스하고, 흐르는 강물처럼 맑으며, 세상의 어두움과 위선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살고 싶었지만, 그런 인생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도 돌이켜 보면 저의 40년은 후회가 많지 않은 선택의 연속이었고 좋은 분들이 곁에 계셨음을 깨달았어요.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기어이 그 선택을 했다면 죽어서도 많이 후회했을 거예요. 남겨진 우리에게 이런 식의 헤어짐은 잊을 수 없어요. 잊은 듯 살아가지만 실은 잊은 척 사는 거라 들었습니다.
자,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지금을 사는 많은 이에서 삶의 고뇌와 부끄러움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가치 있는 삶, 의미를 찾는 생이고자 노력했어요. 괴롭고 끔찍하던 시기에 이런 목표는 당연히 큰 도움이 안 되었죠. 그것이 좌절되니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으니까요. 혹시나 과거의 저와 비슷한 시간을 겪는 분이 계시다면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그냥 살아가세요. 버티셔야 합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묻지 마세요. 태어났으니 사는 거라 합디다. 우리는 유전학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자기를 지키기 위해 살아가요. 기본 설정이 그러해요. 몹시 울고 싶던 날, 제게 큰 위로가 되어준 이 말을 이제는 웃으며 해봅니다. 포기하지 말죠 우리.
고귀한 그대의 삶 자체가 그대에게 무가치하고 때로는 부끄럽게 느껴지더라도 그건 굉장한 오해이며, 그대가 죽지 않고 산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대 삶은 그대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충분한 의미가 있습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일은 이제 그만 생겨야 합니다. 소중한 사람을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아요. 우리는 이미 충분히 아파했고 부서졌으니까요.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 안에 숨겨 놓은 깊은 분노와 외로움을 몰아내고 환한 빛으로 채워 새롭게 시작합시다. 그저 나아가세요.
마지막으로, 야 이놈아, 하며 헛헛하게 웃고 계실 보고 싶은 그대여,
그대 부디 잘 가시오. 그곳에서는 꼭 평안하시오.15년이나 전하지 못한 이 고별사가 그분을 그리워하는 벗들, 어쩔 줄 모르던 순간마저 견뎌준 제게 위안이 되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