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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워앤서퍼 Dec 17. 2021

어쩌다 싱가포르 회사에서 인싸 되다

사과 깎을 줄 아세요?

싱가포르에서 매일 아침 출근하면 루틴이 있었다.

제일 먼저 노트북 전원 버튼을 누르고, 노트북이 켜지는 동안 팬트리로 총총걸음으로 가서 아침 끼니를 할 과일을 집는 것이었다.


이날도 여느 때처럼 아침 끼니 할 사과를 하나 집어 싱크대에서 껍질을 깎고 있을 때였다.

아침에 곧 콜이 있어서 조금 급히 깎고 있었는데, 뒤에서 입 벌린 목소리가 들렸다.



와~~~~~~




뭔가하고 돌아보니 직원이신 청소도우미 아주머니와 동료 두세 명이 나를 둘러싸고 사과 깎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나는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청소도우미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다.


 너 너무 잘 깎는다!! 무슨 쇼 보는 거 같아. 그러다 손 자르겠다. 조심해.


사과를 깎는 게 뭔 대수인가 싶어 너희는 사과 못 깎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확신에 찬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사실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나 또한 문화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두 자녀의 어머니가,
어떻게 흰머리 희끗하신 아주머니가,
어떻게 과일 좋아하는 30대 성인인 그녀가,
사과 껍질을 못 깎는 것인가
한 번도 안 해본 것일까?
그렇다면 사과는 어떻게 먹는 거지? 매번 그냥 껍질째로?


물론 한국에서도 안 해서 잘 못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싱가포르는 동료들 반응을 보니 그들에게 과일을 깎는다는 것 자체가 valid하지 않은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싱가포르 사람들은 집에서 요리도 안 하는 사람들이 많고 과일도 다 잘라져 있는 것 아님 까먹기만 하면 되는 것들이 많았다. 사과는 껍질채 먹고 말이다.

한국에서는 많이들 밥을 먹은 뒤 후식으로 과일을 먹는다는 내 말에 놀람을 내비추던 싱가포르 친구도 떠올랐다.


그 후에도 과일을 좋아하는 나는 종종 팬트리에서 사과, 망고 같은 과일을 깎고는 했는데 보는 동료들마다 옆에 와서는 내가 특별한 기술이라도 지닌 듯 신기해했다. 그리고는 손가락 조심하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제서야 이해가 갔다.

꺼내만 놓으면 몇 시간 내에 사라지는 과일들과 퇴근 시간까지도 손 안 대고 그대로 놓여있는 과일들이 분명하게 갈리는 이유를.

몇 시간 내에 사라지는 과일들은 포도, 바나나, 복숭아, 자두, 귤, 살구 같이 바로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고, 몇 시간 지나도 아무도 손 안대는 과일은 망고, 멜론, 감, 배 같은 과일들이었다.


나의 곡예를 선보인 후 변화도 생겼다.

청소도우미 아주머니나 동료들은 과일이 오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을 때는 내 자리에 슬그머니 찾아와서는 먹을 수 있도록 깎아주기를 부탁하고는 했다.  '나 과일깎기로 인싸 된거야?'  

팬트리를 지나가다가 어설프고 아슬아슬하게 과일을 깎는 아주머니를 보면 내가 그냥 깎아주고 잘라주는 것이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가 과일을 잘라 접시에 먹기 좋게 두면 어떤 과일이든 금방 다 사라지고는 했다. 괜스레 뿌듯했다.


나중에 친한 싱가포르 친구에게 싱가포르 친구랑 동료들이 나 과일 깎을 때 곡예사 보듯 한다고 했더니 40 다 되어가는 본인도 과일을 깎아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용과(드래곤후르츠)는 조각으로 잘라 파먹거나 그냥 입으로 떼어먹고
망고도 돛단배 모양으로 잘라서 칼집 내서 먹고,
파인애플과 수박은 자르기만 하면 되고,
두리안은 잘린 것으로 팔고,
패션푸르츠도 반 잘라서 파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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