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기차역에서 아빠에게 마중 요청 전화를 걸었다가 옆에 계신 할머니께 불똥을 맞았다.
대충 해외에서 귀국 후 안부 전화 한 통 없어 무척이나 실망스럽고 할머니가 날 많이 아꼈는데 나는 그만큼 보답하고 있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장남의 장녀인 나를 많이 사랑해 주셨다고 부모님께 귀가 닳도록 들어왔다. 그리고 아빠는 그 보답으로 나도 잘해야 한다고 덧붙이시기를 잊지 않으셨다.
할머니의 사랑이 전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옆에서 웬만해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시는 엄마도 동의하시는 것을 보면 '정말 그러셨구나' 마음으로 느껴보려 하고는 했다.
성인이 되어서 현재 나는 '할 수 있는 만큼 진심으로 할머니를 위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는 나만의 믿음이 있지만, 어릴 땐 할머니께 잘하는 것은 아빠의 기준에 따라 '전화 빈도수 = 잘하는 정도'인 줄 알았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아빠는 내가 하는 정도가 성에 차지 않으실 때면 나에게 종종 할머니께 안부 인사를 시키시고는 했다. 어린 나는 부모님의 지시에 따라 별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전화를 드려 밋밋한 안부 인사를 드리고는 했다.
물론 할머니는 나의 전화를 무척이나 반기셨고,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 아빠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라' 정도였기 때문에 순조롭게 마무리 되었다.
20대가 되자 상황이 조금 변했다.
철이 좀 들었는지 할머니의 사랑이 마음에 와닿기도 했고, 무조건 주시는 내리사랑이 감사하기도 해서 마음을 할머니께 표현도 해야겠다고 다짐했고 나의 방식으로 그렇게 하기 시작했다. 삶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안아주며 살고 싶었던 나는 용기 내어 안아도 드리고, 혼자 집에서 할머니를 떠올리며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이때즘부터 할머니의 말씀에 두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시집'과 '성실'이었다.
이는 할머니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할머니 시대에는 18세 즈음 다들 혼인을 하셨다고 했으니.
'시집'이란 두 글자는 나의 온몸을 간지럽고 불편하게 했다. 그때부터 나는 '반항' 없이 한 귀로 듣고 흘리는 고도의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어려서부터 진행 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주 다행이었던 건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나이 차가 얼마 안 나는 다른 사촌 언니, 오빠, 동생들도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고, 잔소리도 같이 나눠 들으니 조금 나은 듯했다.
그렇게 20대는 할머니의 말을 들어드리고, 드릴 건 많이 없었지만 내리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할머니께는 진심을 다하되, 내 인생은 의지대로 그려나갔다.
어느덧 30대 가 되었고, 우리의 상황도 변하며 관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할머니의 짝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점점 무거워져 가는 몸으로 시골집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계신다.
예전 하시던 농사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게 작지만 밭도 가꾸신다.
나는 여전히 결혼을 하지 않았고, 성실히 회사에서 일도 하기도 하고 여전히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며 가보지 못한 것, 해보지 못한 것을 위해 떠날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할머니의 눈에는 30대가 되어서도 회사를 성실하게 다니고 있지도 않고 허구하면 회사를 옮겨 다니거나 여행을 가고, 짝을 만나 결혼하기는커녕 혼자 한 해 한 해를 보내는 장손의 장녀의 삶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보다.
전화를 드릴 때마다 20대 때 통화와 다른 잔소리의 규모임을 느낀다.
할머니의 전화 건너 목소리는 호통을 치시듯 커졌고, 단어 선택은 상처를 줄 만큼 거칠어지셨다. 조금 더 세게 말하면 손녀가 말을 좀 듣지 않겠나 싶은 마음이실 수도 있고, 정말 마음이 많이 답답하셔서 이기도 하다.
20대 때 나의 할머니 잔소리는,
뭐든 성실하게 하면 안 될 게 없다.
뭐든 열심히 해.
그리고 짝 만나서 얼른 시집가.
지금 30대 때 나의 할머니 잔소리는,
해외를 갔다는데 어찌나 걱정이 되던지.
일은 안 하고 있고, 걱정이 돼 죽겠다.
내가 부끄러워서 동네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겠다.
얼른 일하고 시집이나 가!!!
전화도 없고 어찌나 실망스럽던지.
너는 어째 그래 못하니
요즘 이런 말들을 들으며 진심이 아님을 알면서도 상처도 받고, 속상할 때도 생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연락을 드리고 싶은 마음도 점점 더 사라진다.
마음은 여전히 할머니를 향하지만서도 이런 잔소리를 듣고 넘기는 데에도 한계가 찾아온다. 아마 나 또한 30대를 조금은 다르게 살며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의 '30대는이래야 한다'는 것에 맞서는 위치에 서게 됐고, '결혼', '성실' 같은 단어들이 더 민감하게 다가오는 것도 한몫할 것이다.
할머니의 위치에 대해, 나에 대해, 이 관계에 대해 생각도 많이 해본다.
할머니의 큰 기대와 생각하시는 이상적인 삶에 대한 태도와 나라는 인간은 정 반대이다. 그렇지만 할머니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내 삶을 바꿀 생각이 없고, 예전에 할머니께 나의 생각을 말씀드렸다가 '지x한다'만 들었기 때문에 (받고 싶은) 지지까지 바라지는 않기로 했다.
할머니의 깊은 사랑을 내가 되갚아줄 수는 없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해서 할머니가 바라시는 이상적인 모습에 나를 끼워 맞출 수도 없지만, 할머니께 여전히 감사하고 사랑하고 싶기 때문에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려 한다.
조금 더 거리를 두되, 할머니 편에서 할머니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 그래서 할머니를 여전히 진심으로 위할 수 있는 손녀가 되는 것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