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니까 사랑이다 - 피에르 뒤셴
남학생과 여교사 간 사랑의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이 소설은 17세 소년의 동정 고백으로 시작한다. 원래 그 나이면 응당 그래야함이 맞지 않나 싶지만, 책 첫 페이지부터 프랑스는 대개 열다섯이나 열여섯 살쯤 이미 한두 번의 XX을 경험한다는 정보를 전달하는 이 책은 프랑스의 1968년 5월에 일어난 68혁명 당시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은, 열병과도 사랑을 갈망하는 17세 소년 ‘제라르’와 32세 철학 교사이자 혁명가, 그리고 어린 쌍둥이를 둔 이혼녀 ‘다니엘’의 사랑은 인물의 소개만 보아도 난항이 예상된다.
다니엘과 제라르는 선생과 제자인 만큼 학교에서 첫 만남을 갖게 된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방학 동안 켜켜이 쌓은 추억으로 들뜬 교실에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에 단발, 싸구려 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들어온다. 학생들은 그녀의 촌스러움과 자신들보다 서너 살은 더 들어 보이는 얼굴에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수군거린다.
그리고 그녀가 어디에, 누구 옆에 앉을지 주목하고 있을 때 단상에 올라서는 모습을 보곤 경악을 금치 못한다. ‘다니엘 게노’ 칠판에 큼지막하니 이름을 쓴 그녀는 학생들에게 제자리에 앉을 것을 명한다. 그러자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찾아가는 학생들. 교사의 권위가 살아있는 시기였던 듯하다. 이지적인 용모에 권위적이지 않으며 친근하게 학생들에게 다가가고, 진보적인 계몽 정신을 가르치는 그녀는 ‘가티노’ 새끼 고양이라는 이탈리아식 애칭의 별명이 붙을 만큼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아진다.
제라르는 다니엘을 좋아하게 되며, 다니엘 역시 소년답지 않은 성숙한 용모에 총명함을 보이는 제라르를 마음에 품게 된다. 그렇게 둘은 제라르의 고백으로 본격적인 연인으로 발전한다. 소설 종반부 “어째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게 죄가 됩니까?”라는 판사를 향한 다니엘의 외침처럼 세상에서 너무 흔하게 발생하는 남녀 간의 사랑은, 17과 32라는 나이 차, 학생과 교사라는 지위로 인해 매스컴에 보도되며 전 국민의 가십거리가 되고 결국 죽음으로써 엔딩을 맞이하는 비극이 된다.
사회적, 법으로 금지된 미성년자와 성인 간의 사랑. 물론 이는 성숙하지 못한 미성년자를 음흉하고 간교한, 못된 성인으로부터 보호함이 목적이다. 하지만 다니엘과 제라르의 사랑은 단순히 개인적인 일탈을 넘어 1968년 5월 일어난 68혁명처럼 권위주의적 통치와 사회적 억압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기도 한다.
소설을 읽다 보면 제라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고작 1년을 조용히 못 있는단 말인가? 하는 답답함이 치밀 것이다. 정말이지 하루살이 같은 그들의 인내심에 욕쟁이 할매에 빙의해 정신 차리라는 걸쭉한 욕지거리와 함께 등짝 스매시를 날려 주고픈 욕망에 복장이 터진다. 하지만 사회가, 법이 정한 사랑의 기준선을 따르는 건 기존 체제에 굴복하고 자유의지를 상실한 노예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다니엘과 제라르는 탈옥과 도망자 생활을 반복하며 자신들의 사랑을 관철하고자 악을 쓴다.
그리고 「아프니까 사랑이다」에서 주목하게 되는 다른 하나는 바로 자식에 관한 부모의 교육관이다. 이는 제라르의 아버지를 통해 드러난다. 둘의 사랑을 가장 격렬히 반대하고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제라르의 아버지는 통제를 벗어난 자식을 견디지 못하며 자신에 대한 반항이라고 생각한다. 제라르는 아버지의 불행을 자식을 ‘낳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얻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자식을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하길 끝까지 거부했으며, 자식을 보호하려고만 했지,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이런 사상은 현대의 부모에게서도 변함없이 발견된다. 자식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기보다는 자신의 소유물, 자신의 꿈을 대변하는 매개체, 명예를 높이는 장신구로 취급하는 부모도 있으나 이건 그룹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다수는 아닐 것이다. 그저 한없는 사랑으로 인해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자신의 손아귀에서 쉽사리 놓아주지 못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점점 몸과 머리가 커짐과 동시에 부모의 손아귀는 좁고 답답하게 느껴질 것이다. 부모는 자식이 넘어져 무릎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자기 무릎을 때리는 것보다 고통스러울지라도 눈물을 머금고 놓아주어야 한다. 자신의 의지로, 광활한 대지를 달리는 쾌감과 행복을 느끼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새장에 갇힌 새는 결코 높은 하늘에서 누리는 행복을 즐길 수 없다.
「아프니까 사랑이다」에서는 부모의 사랑과 연인의 사랑, 사회 통념과 개인적 자유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한다.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법을 어기고, 사회로부터의 지탄을 괘념치 않는 이 모든 리스크를 짊어질 수 있는 건 바로 ‘사랑’ 때문이다.
사랑.
소설이나 영화, 현실에서 말도 안 되는 스토리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게 만드는 개연성 만능열쇠, 사랑. 그 어떤 허무맹랑한 짓거리도 (빈칸)에 (사랑)을 채워 넣으면 개연성이 연결된다. 밤새 일을 하고도 5시간을 운전해 바다를 보러 갔다. Why? (사랑하는 사람이 바다를 보고 싶어 했기에). 납득! 힘들게 모은 수백억을 전부 누군가에게 줬다! Why?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납득! 핵폭탄 수백 발을 쏘아 달을 날려 버렸다! Why? (사랑하는 사람이 달에 대한 공포심을 느끼기 때문에). 납득 완료.
어떠한 행동에 사랑이란 원인을 붙이면 모든 게 이해 가능한 공식으로 변한다. 우리는 때로 술자리에서 자신의 사랑에 관한 영웅적 경험을 얘기하기도 한다. 사랑 때문에 무엇까지 해봤는가? 라는 주제는 술자리에 모인 모두의 감탄을 자아내기도, 박장대소를 터트리기도, 뜨악하는 정적을 가져오기도 한다. 하지만 보통의 사람은 사실 잠들기 전 몸서리를 치며 이불에 발길질하는 수치스러운 경험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마저도 사랑이라는 원인이 없으며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지만 말이다.
‘산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
다니엘의 주방 벽에 붙은 표어의 글귀다. 사회의 법을 떠나서 오로지 도덕적 기준으로 미성년자이자 학생인 제라르와 성인이자 교사인 다니엘의 사랑을 본다면 당신은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 했던가.
“32세 교사와 17세 학생의 교제!” 단순히 표면적인 텍스트로만 상황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사회적 통념에 의한 재빠른 판단을 내리되 사건의 실체에 다가갈 수 없다. 사회적 구성원이 아닌 하나의 독자적인 개인으로 바라보게 되면 연민으로 인해 감히 함부로 손가락질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은 세상만사 모든 일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만능열쇠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이기도 하다. 당신이 어떤 판결을 내릴지 알고 싶다면 책을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난 이 판결에 기권을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