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상에 표기된 해발 2,300m의 타탈리(Tahtalı) 산. 전날 머문 숙소에서 만난 네덜란드 커플은 나와 반대로 길을 걸어오고 있었으며, 산의 정상은 가지 않은 채 지나쳐 왔다고 했다. 그리고 드디어 리키안 웨이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다. 어제의 네덜란드 커플도 리키안 웨이를 걷는 중이긴 했으나 길 위에서가 아닌 숙소에서 만났기에 뭔가 부족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드디어 이 길고도 긴 길 위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다.
난 마치 무인도에서 사람이라도 만난 듯 반갑게 인사했고, 그 역시도 반가이 나를 맞아주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산의 정상을 다녀왔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정상은 가지 않았다고 했다. 너무 높고 가파르기에 그냥 지나쳐 왔단다. 난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정상을 가지 않을 거면 왜 산을 타는 것인가? 정상에서 사진 한 방 남기려고 산을 오르는 거 아닌가? 그들의 나약함을 속으로 안타까이 여기며 산속으로 향했다.
그리고 드디어 만난 갈림길. 직진으로 가면 다음 마을. 오른쪽으로 가면 정상으로 향하는 길. 난 조금 전 다른 이들의 나약함에 혀를 차던 패기와는 다르게 주춤했다. 오른편으로 보이는 정상은 생각보다 높고 가팔랐다. 게다가 나무 하나 없는 돌산에 땡볕의 무게까지 견뎌야 하는 난이도 극악의 코스. 하지만 그다지 그렇게 오래 걸릴 거 같지 않았기에 오로지 ‘정상’ 하나만을 생각하며 오른쪽 길로 들어섰다.
고개를 들기도 힘든 경사에 지그재그로 그어진 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힘겨이 움직였다. 얼마나 올랐을까? 밭일 중에 허리를 펴는 농부의 심정으로 한숨 돌리며 뒤를 돌아보니 꽤 높이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정상은 높았고 거대한 바위에 달라붙은 개미가 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산티아고 순례길부터 깨달은, 걷다 보면 언젠간 도달하리란 간단한 진리를 믿고 걸었다.
그리고 드디어 정상 도착! 해냈다. 기어코 정상에 이르고 말았노라며 환희의 만세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눈앞에는 굽이굽이 돌산의 물결이 펼쳐져 있었고 저 멀리 주위보다 높게 치솟은 봉우리와 전망대로 추정되는 건물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럴 수가……. 지금 내가 밟고 선 곳은 그냥 하나의 고개일 뿐이었다. 이럴 수가……. 난 내가 걸어온 길을 내려다보고 다시 저 멀리 보이는 진짜 정상을 번갈 아봤다. 국토의 70%가 산으로 된 대한민국 출생으로서 저곳이 진짜 정상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실 그냥 누가 봐도 저곳이 정상이었다.
난 자문자답을 시작했다. 문) 지금 서 있는 이곳과 저 진짜 정상과의 고도 차이는 실제로 얼마 되지 않기에 굳이 몇 미터 더 오르고자 고생할 필욘 없지 않을까? 답) 하지만 여기는 정상 딱지가 없는 그저 고개일 뿐이었다. 문) 저 길은 내가 향하는 길과는 방향이 너무 어긋나있다. 답) 하지만 타탈리 산 정상을 가려면 원래 향하는 길에서 빠져나왔다가 다시 돌아가야 하는 걸 알고 있었다. 나의 핑계는 모두 효력을 잃었고 결국엔 본심만이 남았다. 너~무 힘들어 보인 다. 너~무 가기 싫고 지금 오른 고개만으로도 죽을 거 같다. 애초에 정상이 저 멀리 있단 걸 알았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주저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을 때 사진 한 방이 생각났다. 그래! 이 먼 나라까지 와서 이건 타탈리 산을 온 것도 안 온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돌아가기에 아깝지 아니한가! 정상에서 사진 한 장 남겨가자! 그리고 앞서 만난 네덜란드 커플과 길에서 만난 남자에게 한국인은 다르단 걸 보여주자(비록 보여주지는 못하겠지만)! 라는 마음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또다시 한 마리의 개미가 되어 바위산을 나아가기 시작했고 결국 진짜 정상에 도착했다. 그런데…… 오잉? 이게 무슨 일이다냐? 정상으로 가는 입구에 처진 사슬을 넘어 정상으로 들어서니 꽤 많은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게 아닌가? 난 이 황량한 산에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거지 싶었는데 내가 걸어온 길 반대편으로 길게 놓인 케이블카 줄이 보였다. 줄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산 아래를 향해 뻗어있었다. 아하…… 그랬구나…….
남들과는 다른 방향에서 등장한 내게 시선이 집중되었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뭐야? 여기를 걸어 온 거야?”하는, 마치 미개인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띠었다. 난 그런 이들을 애써 무시하며 정상을 한 바퀴 둘러봤다. 한쪽으로는 저 멀리 바다가 보이고, 나머지 방향으로는 산의 물결이 펼쳐져 있었다. 하……. 풍경을 보니 힘들었지만 오를만했다 하는 만족이 들었다. 그리고 케이블카의 존재에 마음까지 한결 편안해졌다. 바다로 향하는 실로 높고 긴 케이블카는 편안한 하산과 함께 엄청난 경관을 선사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난 정상 구경을 마치고 건물 벽에 기대 쉬었다. 배낭과 신발을 벗고 과자를 먹는데 한 남자아이가 다가왔다. 중학생 정도 되려나? 과자를 씹어대는 내 앞에 서더니 튀르키예어로 뭐라고 하기 시작했다. 내가 튀르키예어를 모른다 하자 살짝 난감을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정상 아래쪽을 가리켰다가 검지와 중지를 까딱거리며 걷는 동작을 묘사하는 게 아닌가? 그리곤 마지막으로 엄지를 치켜올려 보였다. 다들 알아들었을 테지만 해석해보자면 내가 걸어오는 걸 지켜봤고, ‘멋있다’란 뜻이었다.
하~ 이런 또 멋진 형아를 알아보는구나? 난 아이의 적극적인 칭찬에 쑥스러웠지만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 아이에게 고맙다 인사를 하곤 한동안 상기돼 있었다. 그런데 그러기도 잠시. 아이의 엄지척은 나를 갈등에 빠트렸는데, ‘지금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면 아이가 실망하지 않을까?’라는 되지도 않을 쓸데없는 고민에 빠져버린 것이다. 엄지척까지 받았는데 이대로 기계문명에 몸을 맡기는 나약한 뒷모습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난 어금니를 깨문 채 넘어왔던 사슬을 다시 한번 건넜다.
사슬을 넘어 저 황량한 돌산으로 걸음을 옮기는 내 뒤로 사람들의 수근거림과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 잘 봐둬라! 이게 대한의 씩씩한 건아이다! 그렇게 난 사람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쉬지 않고 걸었으며 전망대가 보이지 않는 사각에 이르러 서야 대자로 뻗어버렸다. 이런 젠장! 콘셉트에 잡아먹혀 개고생한 하루. 부디 그날의 어린 친구가 아직도 한국인의 투지는 대단하다고 기억해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