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Again 0km

by 서퍼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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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 드디어 리키안 웨이의 마지막 ‘히사르칸디르(Hisarçandır)’에 도착했다. 길의 끝, 혹은 시작이기에 규모가 좀 있는 마을 혹은 기념할만한 조형물을 기대했건만, 그냥 산속 조그만 시골 마을이었다. 그래도 0km 표지판이 길이 공식적으로 길이 끝났음을 나타냈고, 이에 자축하며 셀카도 찍었다.


자,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공식적인 트레킹이 끝났으니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일반 여행자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숙소도, 차도 보이지 않는 산속 마을에 우왕좌왕 고장이 나버렸다. 그렇게 뚝딱거리고 있는데 한 할아버지께서 내게 와보라는 듯 손짓을 하셨고 난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손을 모아 입에 가져다 대는 수신호를 하시는데 밥을 먹고 가라는 뜻. 난 나의 규칙을 상기하며 괜찮다고 정중히 거절하려 했으나 순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정말이다! 먹 을 걸 생각하니 내 배가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이겠다).


오늘 먹은 것이라곤 물 조금과 조그만 과자 두 봉지. ‘그래! 길도 끝낸 마당에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하자’라며 빠른 태세 전환과 규칙 따위는 언제든 이익과 맞바꿔 쓰레기통에 처넣는 유연하고도 썩어빠진 신념을 내보이며 할아버지 집으로 들어섰다. 할아버지의 집은 우리나라 옛 시골집 같은 아늑함이 감싸고 있었고, 난 바닥에 앉아 음식을 기다렸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무려 닭고기를 내어주셨고, 난 염치 불고하고 처음 뵙는 할아버지 댁 거실에 앉아 먹어 치웠다.


그렇게 급한 불은 껐으나 여전히 첩첩산중에 갇힌 나는 일단 큰길로 나갔다. 큰 길이래 봐야 왕복 2차선의 길이었지만 그래도 아스팔트 포장이 된 도로는 내게 ‘안탈리아(Antalya)’까지 갈 수 있는 희망을 보여줬다. 며칠 전, 아니 바로 몇 시간 전만 하더래도 그냥 무심하게 터벅터벅 걸어 나갔을 길. 하지만 0km를 찍고 공식적으로 트레킹을 끝냈다 생각하니 도저히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이 이리도 간약할지니. 그때 마침 도로 가의 과일가게에서 주인아주머니와 얘기를 나누던 한 아저씨께서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난 안탈리아까지 가려고 한다고 하자 버스는 몇 시간 뒤에나 올 것이기에 자기 차로 태워주겠다고 했다. 안탈리아에 사는 아저씨는 부인과 함께 여행을 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난 감사의 인사를 하며 차에 올라탔다. 부부는 마치 홍보담당자처럼 내게 안탈리아에 대해 이것저것 적극적으로 설명해주었다. 덕분에 많은 정보와 함께 편하게 안탈리아에 입성할 수 있었다.


사실 히사르칸디르에서 그동안 걸은 리키안 웨이를 복기하며 마지막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숙소가 없었기에 바로 안탈리아로 올 수밖에 없었기에 떠나면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그런데 막상 안탈리아에 도착하니 그런 아쉬움은 드라이아이스 증발하듯 싹 사라졌다. 크고 아름다운 도시의 풍경에 “어디부터 가보 지?”하는 흥분감이 이미 리키안 웨이의 기억이나 감동 따위는 뒷전으로 내팽개 쳐버렸다. 어쨌든 이렇게 급작스럽게 후다닥 끝나버린 또 하나의 트레킹 ‘리키안 웨이.’


시작부터 끝까지 급작스러웠지만 순간의 선택으로 평생에 다시 못할 경험과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길을 끝났지만 리키안 웨이의 푸른 바다, 시원한 파도, 눈부신 햇살, 친절한 사람들과 함께한 달달한 홍차, 산속에서 길을 잃을 때면 내지른 욕지거리까지, 모두 내 안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날의 추억이 없다면 오늘의 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 것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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