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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스타 Jul 06. 2023

맥주 월드컵


하루 일과를 마치고 혼술을 하거나 약속에서 식사 후 가볍게 술 한 잔을 할 때 우리는 어떤 주종을 선택하는가? 소주는 좀 부담스럽고, 와인은 뭔가 너무 멋내는 거 같고, 막걸리는 하... 혼술 하기엔 상승하는 아재력이 두렵다. 그리하여 우리가 가장 손쉽게 선택하게 되는 주종은 역시나 맥주지 않을까한다. 높지 않은 도수와 시원한 탄산으로 인해 웬만한 음식과의 조합도 훌륭하며 따로 잔 준비할 필요 없이 똑! 따서 쭉! 마실 수 있는 편리성까지. 맥주는 그야말로 알콜계의 무결점 플레이어다.     


TV를 보면서, 게임을 하면서, 책을 읽으면서 또는 그냥 심심해서 습관처럼 한 잔씩 하는 맥주. 오늘도 그냥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맥주 하나를 따서 마시는데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내 인생 최고의 맥주는 뭐였을까?     

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     

그리하여 시작된 내 인생 맥주 월드컵!     

맥주를 홀짝거리며 지금까지 마신 맥주의 종류와 상황을 하나씩 꼽아보았다. 나름 애주가로서 (나를 알콜중독자라는 불쾌한 타이틀로 부르는 최측근이 있지만) 다양한 맥주를 마셔봤다 자부한다.     


처음으로 맥주의 맛이란 것에 눈에 뜨게 한 건 호가든을 맛봤을 때다. 그전까지는 우리나라 양대 산맥 맥주와 대학가 술집에서 마시는 뭔가 알 수 없이 맹맹한, 그저 치킨과 함께라면 만사 오케이였던 생맥이 전부였던 갓성인 시절이었다. 이외에 다른 맥주가 있다는 자각 자체 없던 고만고만이들 사이에서 꼭 하나씩 있는 신문물 선구자가 있었으니. 그 친구를 따라간 세계맥주집에서 호가든을 처음 맛봤다.     


오! 마이! 가뜨!     

내가 지금 뭘 마신 거지? 이것이 정녕 맥주의 맛이란 말인가? 지니어스! 어떻게 이런 기발한 생각을! 요구르트 맛의 호가든은 슈크림 붕어빵을 처음 접했을 때와 같은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이거슨 신세계). 오가든이란 오명 아래 잠시 손절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도 종종 찾게 되며 천편일률적이었던 나의 맥주 세계관을 넓히는 개척자인 존재였음은 분명하다.     


이렇게 호가든으로 시작된 만국 맥주맛 유랑의 절정기는 외국인노동자 신분으로 호주에서 지낼 때였다. 내가 일한 곳은 맥주 한 캔이라도 사려면 차를 타고 20여분 정도를 달려야만 하는 그야말로 깡 to the 촌. 철저히 속세와 단절된 대륙의 들판에서 유일한 낙은 일주일에 한 번씩 일용할 간식과 맥주를 사러 마트에 갈 때였다.   

그때 당시 주류코너가 따로 있는 마트를 처음 접한 난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 여기 있는 모든 종류의 맥주를 마셔보겠노라는 진정한 애주가 (알콜중독자 NoNo) 스러운 다짐을 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맥주 도장깨기를 하던 중 TOOHEYS란 턱걸이도 가능할 것 같은 커다란 뿔을 가진 사슴인지 순록인지가 (하여튼 고라니는 아닌) 그려진 맥주를 맛보게 됐다. 호가든처럼 색다르고 임팩트 있는 맛은 아니었지만 장르불문 결국에는 순정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기본에 충실한 맥주였달까? 앞서 맥주가 알콜계의 무결점 플레이어라고 했다면 TOOHEYS는 맥주계의 무결점 사슴이지 않나 싶다. 이후 깡촌을 떠날 때가지 TOOHEYS를 주주(主酒)로 정착하며 넘버원 타이틀을 쥐여주며 (※공신력 1도 없음 주의) 동네를 떠났다.     


이렇게 여러 맥주를 맛보고 비교분석을 해서 나름 뽑는다고 1등을 뽑아놨지만, 만년 1위 자리를 지킨 건 아니다. 수많은 새로운 맥주의 탄생과 변덕 심한 나의 입맛에 요동치는 주식차트처럼 맥주맛의 순위를 매기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과연 내 인생 최고의 맥주를 뽑는데 특정 맥주 브랜드를 지목할 수 있을까? ‘가장 좋아하는 맥주 브랜드는 무엇인가?’란 질문엔 어울릴 법 하지만 ‘내 인생 최고의 맥주’에 대한 결론으론 부합하지 않는다.     


자고로 ‘인생 베스트’를 뽑는 기준엔 스토리! 그 당시를 떠올리는 추억의 맛이 가미 돼야 후보에라도 오를 수 있지 않을까? 어떠한 진수성찬도 부른 배에는 한낱 겉절이일 뿐이고, 썩은 해골물도 목마른 자에겐 단물이듯 단순히 맥주를 구성하는 성분만으로 ‘최고’의 칭호를 붙일 순 없다.     


그렇게 다시 회상에 젖어 들었고 여러 후보들이 떠올랐다. 친구들과 반지하방에서 동거하던 시절 집 앞 편의점에서 마시던 맥주.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당시 고된 하루 행군을 마치고 마시던 맥주. 여행 시 무작정 들어갔던 허름한 선술집의 맥주 등 “캬~ 그때 그 맥주 참 꿀맛이었지.”하는 쟁쟁한 후보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중 탁하니 떠오르는 하나.     

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2)     

치열한 경쟁을 뚫고 내 인생 (글을 쓰는 지금까지 최고의 맥주에 선정된 건 바로 스무 살 겨울 고깃집에서 마신 맥주가 뽑혔다. (Wow~) 대학교 1학년을 마친 겨울방학.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나의 직책은 ‘숯돌이.’ 고깃집의 꽃이라 불리는 숯돌이 (누가 그렇게 부르냐 하신다면 제가 그럽니다). 업무는 당연히 고기 구울 때 쓸 숯을 만드는 일이다.     


한 평도 안 될법한 좁은 공간에 숯을 피우는 난로와 한가득 쌓인 숯. 그리고 커다란 고무대야에 그을음이 잔뜩 낀 불판이 쌓여 있던 그곳. 면장갑에 고무장갑을 끼고 쭈그려 앉아 숯을 창조한다. 뜨거운 불구덩이 속으로 불사의 심장을 꺼내오듯 손을 집어넣어 숯을 뒤집고 불이 붙도록 한다.     


당연히 불길 속은 호락치 않다. 재빠른 손길로 불길의 온도가 내 손에 이르기 전에 재빨리 숯을 뒤집고 꺼내야 하지만, 조금이라도 늦장을 부리면 어느새 불타는 통증이 몰려온다. 그러면 재빨리 얼음물에 손을 집어넣어 열을 식힌다. 얼음이 녹으면 방문을 두드려 얼음을 충전한다. 숯이 더 이상 필요 없을 때는 고무대야에 담겨 뜨거운 물에 불린 불판을 닦고 손님이 오면 다시 숯을 만든다.     


숯을 낼 때마다 열리는 문틈으로 들어오는 에어컨의 시원한 공기와 화목하고 안락한 인테리어의 매장에서 웃고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이 좁은 방에는 오로지 뜨거운 불길과 시커먼 숯 그리고 이 모든 걸 몸으로 받아들이는 내가 있었다. 그렇게 좁은 방에서 사투를 벌이다 보면 정신이 몽~해지고 갈증이 치민다. 이럴 때면 문을 똑똑 두드리고, 소리를 들은 홀 직원 중 하나가 문을 연다.     


난 생맥주 한 잔을 주문하고 잠시 후 보기만 해도 온몸이 시린 새하얀 서리가 잔뜩 뒤덮인 500cc잔 하나가 들어온다. 한 번의 큰 호흡 후 쭉쭉 들이켜는 맥주. 얼음물에 풍덩 빠진 듯 개운함이 온몸을 쓸어내린다.     

그렇게 일이 끝날 때까지 서너 잔을 비우고 일어나면 취기가 핑하니 돈다. 자정을 넘기고 지하철도 버스도 다 끊긴 시간. 오밤중 달리기가 시작된다. 택시 탈 돈은 없지만, 집까지 뛰어갈 체력은 있었던 스무 살. 지하철 두 정거장을 겨울밤의 칼바람을 뚫고 달리게 해준 건 어린 날의 체력과 맥주로 채워진 혈중취기지 않았을까?     


그 불구덩이 속에서의 맥주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맥주이지 않나 싶다. 맥주니까. 맥주는 시원해야 하니까! 그 어린 날 묵은 때와 나 홀로 숯방에 처박혀 불과 싸웠던 그 더위와 서러움을 시원하게 날려주었던 그 맥주. 오늘도 아무 생각 없이 습관처럼 마시는 맥주. 언젠간 이 같은 최고의 맥주를 마시게 될 날을 고대한다.     

아... 그런데 고생은 사절할게요. 이제는 나이가 좀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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