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털보 아저씨
나에겐 특별한 치킨집 하나가 있다. 아니 있었다. 출출한 밤을 배불리 해주는 야식집이자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자랑임과 동시에 십년지기 절친과도 쉽지 않은 채무 관계를 지녔던 곳. 나의 대학 생활과 함께였던, 20대 초반 시절 나의 피와 살이었던 치킨집.
이 특별한 치킨집을 처음 접한 건 대학교 기숙사에서였다. 때는 바야흐로 20XX년. 부산으로 대학교를 간 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라도 하듯 첫 OT에서 지진을 맞이함과 동시에 전례 없는 폭설이 내린 해이기도 하다(부산에선 눈 구경을 절대 할 수 없다고 했건만). 당시 나를 비롯해 개강 전 기숙사에 들어와 있던 학생들은 모두 제설작업에 투입됐다. 가득 쌓인 눈을 쓸며 대학 생활은 역시나 녹록지 않구나 싶었다.
개학과 동시에 본격적인 대학 생활이 시작되고, 학과, 동아리, 친구의 친구 등 어찌어찌 친분이 생긴 사람들이 늘어났다. 우리는 서로의 방을 돌아다니며 수다를 떨고, 게임을 하고, 대학생의 본분이라 할 수 있는 음주를 했다.
그리고 술에 빠질 수 없는 안주. 그중 최고의 가성비 메뉴는 단연 치킨이었다. 하지만 우리 기숙사는 당시 밤 11시 통금과 함께 기숙사 내 외부 음식 반입금지라는 철권통치가 이뤄지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역사적으로 수많은 억압과 탄압 속에서도 권리와 자유를 쟁취해 내지 않았는가!
그러나 자랑스러운 조상님과는 달리 우리는 그저 힘없는 학생일 뿐이었다. 치킨 하나 먹자고 대학교와 맞서 싸울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옛 선조들의 투쟁 정신을 끌어다 비유하기엔 명분과 가치, 모두 부족했다. 하지만 어쨌든 치킨은 먹어야 했고, 대학이란 작은 사회는 우리 반만년 역사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과 지혜가 존재했으니.
선배들로부터 전수한 방식은 바로 1층의 빨래방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빨래 바구니에 옷가지를 넣어 빨래방으로 향한다. 그리고 빨래방 창문으로 음식으로 받은 후 바구니에 음식을 넣고 옷으로 덮어 숨겨서 가져가곤 했다. 번쩍이는 오토바이 플래시를 발산하며 나타난 치킨집 사장님은 무인도에 떨어진 표류자를 구하러 온 선장 같았다. 실제로 수북한 턱수염이 트레이드마크였던 사장님의 외모 덕에 쓸데없는 비장함이 생겨났다.
빨래방 창문의 보안 창살 사이로 주고받는 치킨과 돈. 우리는 그 어떠한 이들보다 끈끈한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면 경비실 앞을 지나쳐야 했는데, 이때면 어찌나 가슴이 콩닥콩닥하던지. 그런데 사실 눈은 가려도 코는 가릴 수 없으니. 엘리베이터 안을 가득 채운 냄새를 생각하면 경비아저씨가 절대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기숙사 규칙이라는 제약 아래 우리는 나름 지켜야 할 선을 지키고자 성심성의껏 몰래 음식을 운반했고, 경비아저씨께서도 이런 노력을 가상히 여겨 적당히 모른 척하며 좋게 좋게 넘어가지 않았나 싶다.
하여튼 그 치킨집은 우리 기숙사 어둠의 루트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가게였으며, 당시 가난한 대학생에게 맛과 양 모두를 만족시키는 가성비 넘버원은 치킨이었기에, 기숙사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며 털보 아저씨네 치킨을 시켜 먹었다.
우리는 물론 기숙사에서만 치킨을 먹지 않았다. 학교 밑에 위치했던 그 치킨집에 직접 찾아가서도 자주 먹었다.
치킨집 사장님을 교수님보다 더 많이 봤으니, 친분이 쌓이기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팬은 스타를 알아도 스타는 팬 하나하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법이니. 사장님에게 난 그저 손님1에 불과한 학생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내가 드디어 엑스트라에서 좀 더 비중 있는 조연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생겼다. 내가 당시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에서 직원끼리 떠들다가 치킨 얘기가 나왔다. 그러자 난 내 자식이 세상 신동인 줄 아는 극성 부모처럼 그 치킨집에 대한 찬사를 쏟아냈다.
그리고 급기야 다음 출근 때 그 치킨을 사 오겠노라고 선포했다. 이런 팔불출이 또 있을까? 당시 시급으로 4~5시간을 일해야 치킨 한 마리 값을 벌던 때였건만, 내게 그런 금융적 사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이 지구 일짱 치킨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생각지 못한 변수가 있었으니, 치킨집 오픈 시간이 나의 출근 시간보다 늦다는 것이었다. 치킨 때문에 일에 늦게 온다는 말 정도는 가릴 줄 아는 성인의 두뇌를 지닌 대학생이었기에 고심에 빠졌다. 이쯤 되면 그냥 넘어갈 법 하지만 이미 내 몸의 상당 부분이 치킨에 잠식당한 때라 ‘포기’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난 기어코 출근 전날 밤 치킨집에 찾아가 사장님에게 내 사정을 알렸다. 사장님은 난감해하면서도 내심 뿌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고, 직원 한 명을 일찍 출근시켜 치킨을 준비해 준다고 하셨다(이 직원분에게는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많이 늦었지만...). 할렐루야! 나의 절실함과 치킨에 대한 자부심이 사장님을 움직인 것이다. 난 그렇게 첫 기름에 튀겨진 따끈따끈한 치킨을 들고 일하는 곳에 찾아갔다.
이후 난 치킨집에 직접 찾아가서, 기숙사, 학교 밑 자취하는 친구네 등 학교 근처를 골고루 돌아다니며 치킨을 먹었고, 배달하는 사장님은 “어? 오늘은 여기 있네”하며 날 알아보곤 인사를 해 주셨다.
내게 친근한 사장님을 보곤 의아해하는 친구들의 표정을 보며 뿌듯함이 일었다. 당시에는 교수님이나 국회의원보다 더 위인, 무려 치킨집 사장님 인맥이었으니 말이다. 엣헴! 매장에서 먹을 때면 서비스도 한 번씩 받곤 했으니 뭐 가히 절대 권력자와도 같았다.
이때만 해도 모자람 없이 좋은 우호 관계를 이어갔으나 치킨집과의 관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더욱 끈끈한 관계로 도약하는 계기가 있었으니! 그건 내가 대학생의 본분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발생하고 말았다.
아까도 언급했듯 대학생의 본분은 술을 마시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생은 본분에 충실하기엔 너무나도 가난한 모순적 존재가 아니겠는가? 방학 때는 물론이거니와 학기 중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당시 우리의 싱싱한 20대 초반의 간을 감당하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난 술을 먹고 늦은 밤 택시를 타고 학교 밑 친구네 자취방으로 들이닥쳤다. 이유는 기숙사는 통금 시간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대신 택시비를 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난 무턱대고 친구를 불러내 택시비를 부탁하고 친구 방에 쓰러졌다. 친구는 택시비를 채근하는 기사님에 안절부절못하며 오밤중에 자신의 따스한 보금자리를 술 냄새로 물들인 날 원망했을 터였다.
그리고 다음 날. 평소와는 달리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길길이 날뛰는 친구의 모습에 의아했다. 술 먹고 친구네 들이닥친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는 건지. 대수롭지 않아 하는 내게 친구는 어젯밤 내가 술에 취해 쓰러진 이후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택시비는 만 원 남짓으로 사실 그리 큰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친구 역시 나와 같은 지지리 가난한 대학생이었단 사실. 그래도 평소 같았으면 만 원 정도는 있는 형편이었지만 우리는 매달 찾아오는 보릿고개를 겪었다. 용돈과 아르바이트로 생긴 돈이 똑 떨어지는 며칠간의 금전 공백기. 우리는 그런 보릿고개를 서로서로 빌붙으며 명을 유지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보릿고개가 겹치는 경우였다. 그리고 운 없이도 그날 밤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친구는 정말 머리가 새하얘졌다고 한다. 그리고 나름 두뇌를 풀가동해 생각해 낸 게 바로 그 치킨집! 나와의 친분이 있다는 걸 알고 치킨집에 찾아가 사장님께 나를 설명하며 택시비를 부탁했다. 하지만 사장님 입장에서는 난처할 수밖에. 내가 직접 온 것도 아니며, 사실 손님으로서나 반가운 놈이지 이렇게 채무 관계를 질 만큼은 아니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친구의 절박함이 또 한 번 사장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기어코 돈을 빌려냈다.
난 이 이야기를 친구네 방구석에서 숙취와 함께 미친 듯 웃으며 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난 돈을 들고 치킨집 사장님께 찾아갔다. 사장님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사실 학교 밑에서 장사를 하며 이런 상황을 몇 번 겪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호의로 몇 번 빌려주었지만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돈을 돌려받은 적이 없었다고. 변소 들어가기 전과 나온 후가 다른 건 어쩔 수 없으며, 당시 가난하디 가난한 대학생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한다면 양심 역시 쉽게 팔 수 있는 염치 불고한 철판을 가질 때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제는 이런 식으로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고. 그러나 내 친구가 너무 절박하게 구걸하는 바람에 역시나 돌려받지 못할 각오로 주셨다고 한다(이 와중에 친구의 모습이 상상돼 웃을 뻔했으며, 그 광경을 놓친 게 너무 아쉬웠다). 하지만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돈이 없지 양심이 없는(지금은 양심도 조금 없어진 거 같지만), 놈이 아니다. 사장님은 기쁘게 돈을 받으셨고 우리는 그날 이후 더욱 돈독해졌다.
그렇게 평생 학생의 신분으로 치킨이나 먹으며 살 줄 알았지만 결국 졸업을 하는 날이 왔다. 그렇게 기역, 니은을 배우며 시작된, 길고도 길었던 학생이란 신분을 벗어던진 날. 그리고 치킨집과도 안녕이었다. 물론 졸업 후에도 한 번씩 찾아가곤 했다. 그럴 때면 “어?”하며 사장님은 날 알아봐 주셨다.
그렇게 간간이, 정말 간간이 찾던 치킨집은 어느새 내가 부산을 떠나면서 정말 오랫동안 찾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부산에 갔다가 오랜만에 찾은 그 치킨집. 사장님은 날 알아보지 못했고 나는 다시 손님1로 돌아가 있었다.
나 역시 구태여 나를 기억하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변치 않은, 여전히 달달한 양념치킨과 사장님의 덥수룩한 수염을 보며 옛 시절 추억에 미소 지을 뿐이었다. 아직도 한 번씩 택시비를 빌리러 갔던 친구와 그 치킨집 얘기를 한다. 그 집 치킨은 정말 맛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