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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스타 Oct 24. 2024

김밥

묵직한 봉지

그저 김밥이 먹고 싶었습니다

몹시 피곤하고 지친 늦은 밤이었기에

출출한 배를 달래주기에 김밥이 제격이었기에

하지만 뜻하지 않게 묵직한 김밥 봉지를 받았습니다          

늦은 밤.



약속에 다녀오는 길 출출한 속을 채우기 위해 김밥집에 들렀다. 

처음 보는 곳이었다. 

그 당시 1년 넘게 산 동네였건만 ‘이런 곳에 김밥집이?’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름 동네 번화가로, 술집이 즐비한 메인거리인 곳에 약간은 생뚱맞게 자리 잡은 허름한 김밥집. 소위 잘나가는 유명 프랜차이즈 김밥집도 아니었다. 

간판의 연식으로 보건대 최근 오픈해서 못 알아본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깔끔하고 세련되게 꾸며진 다른 가게와 비교하면 더 눈에 띄어야 정상이지 않나 싶을 정도였으나, 이상하게 계속 봐도 수풀 사이에 파묻힌 바위처럼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1년여 동안 그래왔듯 매장을 향한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오로지 김밥을 향한 맹목적 갈망으로 걸어갔다. 김밥집에 들어서자, 내부는 외관보다 더 허름했다.


위생 상태가 살짝 걱정될 정도였지만 김밥... 김밥이 너무 먹고 싶었다. 메인거리에 위치한 만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빠르게 벽에 붙은 메뉴판의 가격을 스캔했다. 다행히 이 세상 양심 품은 가격에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장님~ 사장니임~~”

두 번의 부름 끝에 주방에 홀로 계시던 할머니가 나타났다. 딱 봐도 ‘내가 이 구역 일짱이여!’란 포스를 뿜으며 훠이훠이 걸어 나오셨다. 난 김밥 두 줄을 주문했고 할머니는 김밥을 말기 시작했다.      

가게 한편에 걸린 텔레비전에서는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김밥을 기다리며 멍하니 광고를 바라보던 내게 할머니는 ‘누가’ 나와서 ‘무슨’ 프로그램을 재밌게 본다며 급작스런 스몰토크를 시작했다. 

난 사실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았기에 할머니가 말하는 ‘무슨’ 프로그램이 뭔지, 거기에 나오는 ‘누구’도 잘 몰랐기에 그냥 “아... 그러세요?” 하며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대꾸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자연스레 다른 프로그램으로 주제를 옮겼는데 얼마 전 본 다큐멘터리에 대해 말씀하시며 “동물 사는 게 사람이랑 똑같다”고 하셨다. 난 역시 그 다큐를 보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손에서 조물조물 빚어지는 ‘나의 김밥’에 해가 되지 않도록 동물과 인간에 대한 나만의 철학을 담아 조금 더 길고 성실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지요. 사람이건 동물이건 다 힘들지요.”     

그러자 할머니는 다큐에서 본 내용에 대해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기 새끼를 위해 젖을 물리는 물개는 체중의 30%가 빠지며, 새끼가 죽어도 계속 젖을 물린단다. 그리고 사체를 먹으려 덤벼드는 독수리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할머니의 말이 길어짐에 할머니를 응시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그제야 할머니의 굽은 허리와 불편해 보이는 거동, 쭈글쭈글한 손이 보였다. 순간 조금 전, 마치 인생을 통달한 선인마냥 “다 힘들지요”라며 건방을 떨었던 과거에 내 모습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김밥 마는 걸 끝낸 할머니는 허리를 한 번 쭉~ 피시고는 절뚝이며 걸어오셨다. 할머니는 내게 김밥을 건네며 “늦게까지 있었더니 그래도 하나 더 파네”라며 “허허” 웃으셨다.

난 그저 김밥이 먹고 싶었을 뿐인데...

할머니께서 건넨 김밥 봉지가 너무도 묵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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