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존재하나요?
네. 그렇습니다.
당신이 건넨 친절에,
당신이 짓는 미소에,
당신과 내가 주고받는 눈빛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신이 됩니다.
무신론자인 내게 독실한 기독교 모태신앙인 친구는 말한다.
“때가 되면 하느님이 찾아올 것”이라고(술을 마시면서).
그러면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그래?”라고 대답하지만, 솔직히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없다. 비록 아직도 하늘을 나는 제트스키의 대중화가 되지 못한(‘2020 원더키디’는 거짓말이었어!), 빈약한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현대지만, 나름 화상채팅까지는 가능한 21세기를 사는 내게 신이라는 존재는 물리적으로 이해 불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두 명도 아니고 세상 각지 수많은 사람(최소 억대 인구)이 ‘신’은 있다고 말하니 “진짜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그렇기에 신이란 내가 이해 못 한다고 “신은 없다!” 단정 짓기도, 그렇다고 “다들 있다고 하니 있는 건가?”라며 덜컥 믿기도 힘든 난제라 하겠다.
물론 기본적으론 불신론자긴 하지만 이런 내게도 한 번씩 신의 존재감이 강하게 느껴질 때가 있으니. 왜 다들 살면서 때때로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그저 우연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면서도 신경이 쓰이는, 기감의 농도가 진한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그냥 “오! 이런 우연이?” “와우! 럭키!”라고 흘려보내기엔 여기 내 옆의 공간이 묘하게 싸한, 그럴 때.
나 역시 자주는 아니지만 살면서 이런 싸함을 몇 차례 느꼈다. 그리고 그중 만약 신이 있다면, 내게 가장 가깝게 스쳐 갔던 때는 무릉계곡에서가 아닐까싶다.
때는 바야흐로 옛날 옛적 군인 시절. 당시 G.O.P에서 근무 중이던 나는 해가 뜨고 지는 하루와 푸르렀다가 붉었다가 하얗게 변하는 계절의 변화를 절실히 체감할 수 있는 산의 매력에 빠져 있었다. 그 결과 휴가를 나와 집 대신 산을 찾는, 완전히 군인화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무릉계곡을 찾은 휴가. 무릉계곡 근처 숙소에서 하루를 묵고 이른 아침 버스를 타고 무릉계곡으로 향했다.
학창 시절 ‘한국 지리’인가 ‘사회’인가, 하여튼 교과서에서만 봤던 지역을 직접 본다는 설렘으로 가득 차 들어선 무릉계곡. 계곡 초입부터 교과서에 봤던 장면이 펼쳐졌다. 무릉반석에 새겨진 수많은 글자를 보자 “교과서는 진짜였다!” 공교육에 대한 신뢰가 살아났다. 이는 마치 무릉도원으로 입장하는 주문과도 같았으니, 허락받지 않은, 불순한 자가 들어서면 글자에서 빛이 나며 결계가 발동될 것 같았다.
무릉계곡은 절경이었다. 거대하면서도 매끈한 바위 위로 시원한 물줄기가 흘렀고, 계곡 양옆으로 솟은 두 줄기의 산은 세상으로부터 무릉도원을 가두는 거대한 성채와도 같았다.
한 시야에 담기는 짙은 녹음의 산과 투명한 물줄기, 청명한 하늘은 그야말로 한 폭의 동양화였다. 영화 ‘전우치’의 강동원이 으쌰으쌰하는 BGM과 함께 등장해 붓으로 학을 그려내 타고 날아갈 것만 같은 풍경.
구름을 타고 노는 신선처럼 내 마음은 한껏 들떴다. 여기에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패기가 결합해, 정신이 육체를 지배함에 이르렀다.
“이 정도 산은 공복에 가뿐히 오르는 아침 산책 정도에 불과하지. 훗!”
오전 중에 후딱 산행을 마치고 내려와 절에서 점심 공양이나 받을 요량으로 아침은 호기롭게 패스! 신선놀음하듯 뒷짐을 지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산을 오른지 얼마나 되었을까? 난 극심한 허기를 느꼈다.
규칙적인 삼시세끼에 맞춰진 군인의 바이오리듬은 제시간에 들어오지 않는 영양소에 ‘진돗개 하나’를 발령. 잠시나마 육체를 지배했던 정신은 삼일천하는커녕 고작 30분 만에 각성이 풀리며 제자리로 쫓겨났다.
그렇게 이제 막 산을 올랐건만, 다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 이런 절경을 놔두고 고작 배고픔 때문에 하산해야 하다니! 허망함에 자괴감이 몰려왔다. 다시 정신을 부여잡고 산행에 대한 의지를 다잡았으나 이미 통제를 벗어난 몸은 순순히 허락지 않았다.
“밥 없이 난 일할 수 없어!”라며 완강한 태도를 보이는 몸뚱아리. 결국 눈앞의 계단만 올랐다가 되돌아가기로 마음먹고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그렇게 고개를 떨구고 한 걸음 한 걸음 인내의 발걸음으로 마침내 오른 계단. 계단의 끝에는 한 아주머니가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주머니는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들고 있던 홍시를 반 가르며 태연하게 내게 건넸다.
“자, 이건 네 거다.”
평소 같았으면 한국인의 미덕을 보이며 과한 표정과 손사래로 거절하다 서너 번의 실갱이 끝에 겨우 받았을 것을 단박에 넙죽 받았다. 나 역시 그 홍시 반쪽이 마치 원래 내 것이었던 것처럼.
이 일련의 과정이 마치 무릉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처럼, 바람처럼 자연스러웠다. 숨을 고르며 홍시를 먹었다. 깜깜했던 눈앞에 다시금 무릉도원의 절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
정말이지 어른들 말은 틀린 게 없다니까. 홍시 반쪽의 걸쭉한 달달함에 옛 선조부터 내려오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절로 떠올랐다.
반쪽짜리 홍시의 힘으로 나는 산행을 더 이어갈 수 있었고 이는 정확하게 내가 필요한 만큼의 열량만큼만 보태주었다. 정말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완벽하게 적당했던 양. 이후 계획대로 점심시간에 맞춰 절에 도착해 공양을 받을 수 있었으니. 그 맛 역시 일품이었다. 이 역시도 정확했던 홍시의 양 덕이었다.
배가 부르고 여유가 생기니 그제야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묘하게 느껴졌다. 어찌 그런 이른 시간에 나를 기다린 듯 떡하니 있었을까? 그것도 마치 내게 홍시를 주기 위해서 기다렸던 것처럼.
그저 내가 불쌍해 보여서 홍시를 나눠준 것일까? 곧 죽을 기색으로 계단을 오르는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이 짠해진 걸까?
하지만 타이밍, 홍시라는 평소에는 먹기 힘든 아이템, 너무나도 태연한 아주머니의 태도, 그리고 무릉계곡이라는 배경까지 모든 게 단순히 우연이라기엔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정말 신은 존재 하는가?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술과 담배를 즐기는, 하지만 신앙심만큼은 진짜인 기독교 모태신앙 친구의 말처럼 언젠가 신이 내게 찾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만약 평생 신이 나를 찾아오지 않아도 계단 위 아주머니처럼 홍시 반쪽을 나눠주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살이는 그거로 충분하단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