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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스타 Oct 24. 2024

맥주

최고의 한 잔

일과를 마치고 혼술을 하거나, 식사 후 가볍게 술 한잔할 때면 우리는 어떤 주종(酒種)을 택하는가? 소주는 좀 부담스럽고, 와인이나 위스키는 뭔가 너무 멋 내는 거 같고, 막걸리는 하... 혼술 하기엔 상승하는 아재력이 두렵다. 그리하여 우리가 가장 손쉽게 선택하게 되는 술은 역시나 맥주지 않을까 하다.


시원한 탄산으로 인해 다양한 음식과의 조합도 훌륭하며, 높지 않은 도수에 숙취 부담도 적으며, 따로 잔을 준비할 필요도 없이 똑! 따서 쭉! 마실 수 있는 편리성까지. 맥주는 그야말로 알콜계의 무결점 플레이어라 할 수 있다.      


TV를 보면서, 게임을 하면서, 책을 읽으면서 또는 그냥 심심해서 습관처럼 한 잔씩 하는 맥주. 오늘도 그냥 그렇게 습관적으로 맥주 하나를 따서 마시는데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내 인생 최고의 맥주는 뭐였을까?   

   

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

그리하여 시작된 내 인생 맥주 월드컵!     

캔맥주를 홀짝거리며 지금까지 마신 맥주를 떠올려 보았다. 나름 애주가로서(나를 알콜 중독자라는 불쾌한 타이틀로 부르는 측근이 있지만) 수많은 술자리와 맥주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중 내 맥주 인생 첫 번째 임팩트라 할 수 있는 건 바로 ‘호가든’을 맛봤을 때다. 그전까지는 우리나라 맥주 양대 산맥 ‘카스’ & ‘하이트’와 대학가 술집에서 마시는 뭔가 미묘하게 씁쓸하고 맹맹한 생맥주가 전부였다. 그저 치킨과 함께라면 만사 오케이였던 갓난 어른이 시절.


고만고만이들끼리 어울려 술을 먹으러 다녔으니 뭐가 더 있었겠냐만은, 그중에 꼭 하나씩 있는 신문물 선구자가 있었으니. 선구자 친구를 따라 그 시절 한창 유행하며 우후죽순 생겨나던 ‘세계 맥줏집’에서 호가든을 처음 맛봤다.     

오! 마이! 가뜨!

내가 지금 뭘 마신 거지? 이것이 정녕 맥주의 맛이란 말인가? 지니어스! 맥주에 야쿠르트를 탄 듯 상큼하고 달달한 맛은 슈크림 붕어빵을 처음 접했을 때와 같은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야말로 신. 세. 계. ‘오가든’이란 오명 아래 잠시 손절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도 종종 편의점 4캔 맥주 세트 중 하나로 선별되기도 하며, 쇄국정책을 펼치던 나의 맥주 세계관을 넓히는 개척자인 존재였음은 분명하다.     

이렇게 호가든으로 시작한 만국 맥주 맛 유랑의 절정기는 외국인노동자 신분으로 호주에서 지낼 때였다. 내가 일한 곳은 맥주 한 캔이라도 사려면 차를 타고 20여 분 정도를 달려야만 하는 그야말로 깡 to the 촌. 철저히 속세와 단절된 대륙의 들판에서 유일한 낙은 일주일에 한 번씩 일용할 간식과 맥주를 사러 마트에 갈 때였다.     

그때 당시 주류코너가 따로 있는 마트를 처음 접한 난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 여기 있는 모든 종류의 맥주를 마셔보겠노라는 진정한 애주가(알콜 중독자 아님)스러운 다짐을 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맥주 도장 깨기를 하던 중 ‘TOOHEYS’를 마시게 됐다.     

턱걸이도 가능할 것 같은 커다란 뿔을 가진 사슴인지 순록인지가(하여튼 고라니는 아닌) 그려진 맥주. 호가든을 처음 접했을 때처럼 색다르고 충격적인 맛은 아니었지만, 장르 불문, 결국에는 순정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기본에 충실한 맥주였달까?      


앞서 맥주가 알콜계의 무결점 플레이어라고 했다면 TOOHEYS는 맥주 중에 무결점 맥주이지 않나 싶다. 이후 깡 to the 촌을 떠날 때까지 TOOHEYS를 주주(主酒)로 삼으며 고된 노동자의 삶을 버텨냈다.     

이렇게 여러 맥주를 맛보고 비교분석 해서 나름 1등을 뽑아 놨지만, 만년 1위 자리를 지킨 건 아니다. 수많은 새로운 맥주의 탄생과 변덕 심한 나의 입맛에 맥주맛 순위는 코인 차트처럼 요동치기에 사실상 의미가 없으며, 오로지 성분에 의한 맛으로 순위를 매기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과연 내 인생 최고의 맥주를 뽑는데 특정 맥주 브랜드를 지목할 수 있을까? ‘가장 좋아하는 맥주 브랜드는 무엇인가?’란 질문엔 어울릴 법 하지만, ‘내 인생 최고의 맥주’로써의 선정으론 부합하지 않는다.     

과연 내 인생 최고의 맥주는 무엇인가? 그렇게 다시 회상에 젖어 들었고(이게 뭐라고... 나 진짜 알콜 중독자인가...?) 여러 후보가 떠올랐다. 반지하방에서 친구들과 동거하던 지지리 궁상 시절, 집 앞 편의점에 슬리퍼 질질 끌고 나와 시답잖은 농담에 낄낄거리며 마시던 맥주.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뙤약볕 아래 20~30km의 행군을 마친 후 마시던 맥주. 해외여행 때 무작정 들어갔던 허름한 선술집의 맥주 등 “캬! 그때 그 맥주 참 꿀맛이었지.”하는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중 탁하니 떠오르는 하나.


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2)

치열한 경쟁을 뚫고 내 인생 최고의 맥주에 선정된 건 바로 스무 살 겨울 고깃집에서 마신 맥주가 뽑혔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친 겨울방학. 난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나의 직책은 ‘숯돌이.’ 고깃집의 꽃이라 불리는 숯돌이(누가 그렇게 부르냐 하신다면 그건 바로 접니다). 업무는 당연히 고기 구울 때 쓸 숯을 만드는 일이다.


한 평도 안 되는 좁은 공간에 숯을 피우는 난로와 한가득 쌓인 숯. 그리고 커다란 고무대야에 그을음이 잔뜩 낀 불판이 쌓여 있던 그곳. 면장갑에 고무장갑을 끼고 쭈그려 앉아 숯을 창조한다. 뜨거운 불구덩이 속으로 불사의 심장을 꺼내오듯 손을 집어넣어 숯을 뒤집고 불이 붙도록 한다.    

  

당연히 불길 속은 호락치 않다. 재빠른 손길로 불길의 뜨거움이 내 손에 이르기 전에 재빨리 숯을 뒤집고 꺼내야 하지만 조금이라도 늦장을 부리면 어느새 말 그대로 불타는 통증이 몰려온다. 그럴 때면 재빨리 얼음물에 손을 집어넣어 열을 식힌다. 그렇게 열탕과 냉탕을 오가며 숯을 만들고, 숯이 더 이상 필요 없을 때는 고무대야에 담겨 뜨거운 물에 불린 불판을 닦는다.      


숯을 낼 때마다 열리는 문틈으로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간 시원한 공기와 화목하게 웃고 즐기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좁은 방에서 뜨거운 불과 시커먼 숯, 그리고 이 모든 걸 몸으로 받아들이는 내가 있었다.     


그렇게 뜨겁고 좁은 숯방에서 사투를 벌이다 보면 정신이 몽롱해지며 갈증이 치민다. 이럴 때면 난 문을 두드린다. 그러면 문소리를 들은 직원 하나가 문을 연다. 직원의 눈엔 매캐한 냄새와 찜통 같은 방에 갇혀 처참한 몰골을 한 내가 보였을 터. 난 문을 연 직원에게 손가락 하나를 치켜든다.


나의 수신호를 받은 직원은 곧장 보기만 해도 온몸이 시린, 새하얀 서리가 잔뜩 뒤덮인 생맥주 한잔을 들고 온다. 아무리 매장에 사람이 많아도 내 주문이 최우선이었다. 한 번의 깊은 호흡 후 쭉쭉 들이켜는 맥주. 이는 얼음물에 풍덩 빠진 듯한 짜릿함과 동시에 내 몸속 십이지장 곳곳에 낀 숯가루를 쓸어냈다.    

 

그렇게 일이 끝날 때까지 생맥주 서너 잔을 비우고 일어나면 그제야 취기가 핑하니 돌았다. 지하철도 버스도 다 끊긴 시간. 오밤중 달리기가 시작된다. 택시 탈 돈은 없지만 집까지 뛰어갈 체력은 있었던 스무 살. 겨울밤의 칼바람을 뚫고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를 달릴 수 있었던 건 어린 날의 체력과 맥주로 충전된 혈중취기 때문이었으니.     


나 홀로 숯방에 처박혀 불과 싸웠던 더위와 서러움을 시원하게 날려주었던 그 맥주. 그 불구덩이 속에서의 맥주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맥주이지 않나 싶다. 맥주니까. 맥주는 시원해야 하니까. 다시 한번 그날의 그 맥주 맛을 느껴보고 싶다.     


아... 그런데 고생은 사절할게요. 이제는 나이가 좀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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