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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스타 Oct 24. 2024

쇼콜라

쓰디쓴 음식

Once upon a time. 

아주 먼먼 옛날. 나에게도 여자친구라는 신화급 존재가 있었던, 너무 까마득해서 마치 전생과도 같은 시절. 난 여자친구와 길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여친님께서는 심기가 조금 불편해 보였다. 많이 걸어서 피곤한 탓일까?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여자친구를 위해, 난 지금은 믿기 힘든 눈치를 발동해 ‘단 것’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쇼콜라 가게가 있었고 난 몸에 불붙은 사람을 물웅덩이로 안내하듯 여자친구를 인도했다. 서둘러 쇼콜라 케이크와 음료를 주문했고, 다행히 포크질 몇 번에 여자친구는 금세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어린 중생의 현명한 판단에 흡족해했다. 


그렇게 설탕과 도파민의 힘으로 행복을 되찾은 우리는 화기애애하게 다른 연인들처럼 시답잖은 얘기를 아주 재밌게 나불대고 있었다. 중간중간 검은 마약, 쇼콜라를 여자친구에게 먹이는 것을 잊지 않으며 말이다.     

그런데 그때 테이블에 올려진 여자친구의 휴대폰에 문자가 하나 왔다. 난 딱히 보려 한 건 아니었지만 그저 조건반사로 휴대폰을 쳐다봤을 뿐이다. 그리고 인간 뇌의 정보처리 능력은 냥냥이의 연속펀치처럼 빠르다. 비록 나와 같은 저성능일지라도.     


문자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받는 “뭐해?”와 같은 단순한 내용이 아니었다. 눈짓 한 번에 발송인이 여자친구의 엄마라는 것과 엄청난 장문이라는 점. 그리고 중간중간 보이는 자극적인 단어들이 나의 시선을 잡아끌었고 난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보다 성능 좋은 뇌를 탑재한 여자친구 역시 단번에 내용을 파악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자친구 역시 나처럼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 채 굳은 자세로 문자를 완독했다. 

문자 내용은 대략 여자친구에게 나와의 결별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넌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쁜데 뭐가 아쉬워서 저렇게 못난 남자를 만나느냐. 세상에 좋은 남자는 널리고 널렸으니 어서 저 똥차는 차버리라는, 참으로 딸을 걱정하는 아름다운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문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여러 부류로 나뉜다. 대부분 사람은 화가 치밀 것이며, 또한 이 화를 표출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삼류나 하는 짓이다. 소수는 화가 나지만 애써 덤덤한 척, 혹은 못 본 척 넘길 것이다. 이는 이류다. 그렇다면 극소수의 일류는 어떻게 할까? 정답은 없다. 일류인 사람은 여자친구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이런 문자를 받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류, 삼류도 아닌... 그저 눈물만 나는 등급이었다.


“일류는 힘든 상황에서도 언제나 웃는 거래!” 

어디서 껍데기만 주워들은 명언에 난 어쭙잖은 일류 코스프레를 하며 웃었다.

“안 그래도 헤어질 거라고 그래. 곧 헤어질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답장 해드려. 하하하.” 쇼콜라 가게를 찾았을 때처럼 자랑스러운 미소를 한가득 하고서 말이다. 여자친구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휴대폰을 집어서 호주머니에 넣었다. 난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딴에는 쿨하고 재치 있다고 생각하며 반응 없는 여자친구에게 계속해서 헤어지겠다며 답장하라고 부추겼다.     


어딘가 많이 모자란 나와는 달리 현명한 사람이었던 여자친구는 나의 행동에 크게 반응하지 않으며 자연스레 데이트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이제 쇼콜라가 필요한 건 나였다.      

말은 씨가 된다고. 아니 그저 나의 꽁하고 속 좁은 천성 때문이겠지. 실제로 그날 여자친구 어머니의 문자를 본 이후 나의 태도는 달라졌다.      


난 “내가 받은 치욕을 갚아봐!” “내가 주는 사랑의 세배는 줘야 할 거야! 나에게 그런 치욕을 주고서 그 정도도 하지 않으면 나를 계속 만날 생각이 없다는 것으로 간주하겠어!”란 태도를 보였다.     

대놓고 이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여자친구에게 보내는 사랑과 배려의 크기가 점점 작아졌다. 그럼에도 여자친구는 꽤 오래 인내하며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얇아지는 사랑의 관은 결국 완전히 막히고야 말았다.     


그렇게 내 인생 첫사랑은 끝이 났다.

쇼콜라는 참으로 쓰디쓴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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