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된 동정
세상은 진실의 초라함보다 잘 가공된 서사의 안락함을 택하곤 한다. 타인의 비극을 안쓰럽다는 한마디로 요약해 버리는 동정은, 실상 그 고통을 자신과 상관없는 낮은 곳에 박제해 두려는 오만한 방어기제에 가까운 것이다. 도시 외각의 낡은 반지하 방에서 내가 누렸던 '지면 위 10센티미터'의 평화 역시 타인의 눈에는 가난이라는 초라한 진실이었겠지만, 내게는 그 어떤 가공된 서사보다 안락한 무음의 성채였다. 그 성채가 무너진 것은 갑작스러운 시골행이었다.
그렇게, 내 어린 시절은 매끄러운 기만이 끼어들 틈이 없는 투명하고도 지독한 불통의 공간으로 재편되었다. 낡은 창틀 너머로 발바닥만 보이던 낮은 시선은, 이제 거실을 가득 채우는 할머니의 기괴한 쇳소리에 난도질당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언어를 잃은 인간이 뱉어내는 가장 원초적인 파열음이었다. 처음 그 집에 발을 들였을 때, 농인인 할머니와 할아버지 또한 처음 봤다. 어린아이의 세계는 의외로 유연해서, 편견이라는 필터가 끼어들기 전까지는 무엇이든 풍경의 일부로 수용하곤 한다. 할머니가 뱉어내는 쇳소리 섞인 소음도 내게는 그저 낡은 대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처럼 커다란 자극이 되지 않았다. 그때의 할머니는 그저 소리가 조금 독특한 가족의 일원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우리 집을 채우는 이 소리가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해를 거듭하면서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지기 시작했고, 이젠 할머니의 소리를 더 이상 풍경으로 두지 않았다. 그것은 고막을 긁어내고 뇌의 가장 깊은 곳을 난도질하는 '소음'으로 진화했다. 할머니는 자신의 의지가 조금이라도 소외된다 싶으면 거실이 떠나가라 뱉어냈다. 그 기괴한 쇳소리는 정제된 언어가 아니라,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 채 집안의 공기를 난도질하는 소음의 폭력이었다.
반면, 같은 농인이었던 할아버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고요를 선택했다. 할머니와 똑같이 세상의 주파수를 빼앗겼지만, 할아버지는 휴대용 라디오 이어폰을 깊숙이 꽂은 채 담배 연기 속으로 자신을 정갈하게 가두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발작적인 소음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이 집안의 유일한 평온한 섬 같았다. 엄마조차 할머니는 버거워했을지언정 할아버지는 진심으로 좋아했다. 할아버지의 존재는 엄마와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벽이었다.
하지만 그 벽 뒤에는 남들이 기피하는 서늘한 생존의 비린내도 숨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이 차마 손대지 못하는 돼지와 개의 멲을 따는 일 또한 묵묵히 도맡아 하셨다. 한 달에 한 번, 마당에서 날카로운 도끼가 번뜩이고 짐승의 처절한 비명이 시작될 때마다 엄마는 서둘러 "이런 거 보면 안 돼" 라며 거실 커튼을 쳤다. 그때의 엄마의 목소리는 할머니의 쇳소리보다 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칼날 끝에서 생명이 멎고 나면, 할아버지는 다시 이어폰을 꽂고 침묵 속으로 돌아간다. 남들이 꺼리는 죽음의 현장을 덤덤하게 치러내던 그 비정상적인 평온함은, 어쩌면 아주 어릴 적부터 세상의 모진 일을 홀로 감당하며 단단하게 굳어버린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쇳소리가 날것의 비명이었다면, 할아버지의 침묵은 그 모든 비명을 집어삼키고 박제해 버린 무덤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 무덤 같은 벽조차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 할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시며 허망하게 무너졌다. 섬이 사라지자 지옥의 소음은 온전히 엄마의 몫이 되었다.
세상은 할머니를 '보살펴야 할 약자'로 규정했다. 그로 인해 노인의 쇳소리는 가련한 몸부림으로 포장되어 담장을 넘었고, 동네 사람들에겐 '가련한 시어머니와 못된 며느리'라는 소문이 돌았다. 엄마는 그 얘기를 하며 엄청 울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깨달았다. 말을 못 한다고 해서 그 존재가 반드시 무해한 것은 아니며, 약자라는 프레임으로 누군가의 실질적인 폭력을 가려주는 것 또한 지독한 차별이라는 것을.
아빠를 제외한 나머지 7형제는 진즉에 이 소리를 피해 도시로 도망쳐 각자의 안온한 삶을 꾸린 게 이해가 됐다. 우리 또한 그 소름으로부터 같이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것이 장남으로서의 부채감이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아빠가 선택한 이 '회귀'의 대가는 오롯이 감당해야 했던 건 엄마였다는 사실이다. 멀리서 '가족의 도리'를 읊조리며 방황하던 친척들보다, 우리를 다시 이 소음의 한복판에 앉혀둔 아빠의 침묵이 더 잔인했다.
결국, 엄마는 한계를 맞이했다. 늦은 밤마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마주 앉혀두고 무릎을 꿇은 채 울었다.
"미안해, 엄마가 너희 때문에라도 살고 싶은데 도저히 못 살겠다."
이 말을 수없이 들을 때마다 나와 동생도 소리 내어 울며 엄마를 수없이 끌어안았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소음에는 예민하지만 정작 감정에는 무감각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 '가족'이라는 게 대체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은 건조한 상태가 되었다.
엄마가 집을 나가면, 아빠는 그런 엄마를 집요하게 찾아다녔다. 심지어 학교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거짓말까지 하며 우리 둘을 데리고 외가에 숨어있던 엄마를 끌고 왔다. 그 뒤로도 지옥의 재입소와 탈출이 수차례 반복되었다. 그 위태로운 줄타기는 내가 고등학생이 될 때 끝이났다.
이혼.
우리는 망설임 없이 엄마를 따라 그 지옥 같은 쇳소리의 집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