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의 망명지
엄마를 따라가며 처음 셋이서 둥지를 튼 곳은 작은 원룸이었다.
혼자 살기엔 넉넉하고 셋이 살기엔 좁은 공간, 소파나 침대는 사치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 공간에서 나란히 이불을 깔고 자고, 작은 접이식 테이블 위의 엄마가 해주는 맛있는 밥을 먹는 것이 그저 행복했다. 그렇게 1년 정도를 살다 우리는 두 번째 둥지인 임대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의 나는 ‘임대아파트’라는 이름이 우리 가족의 상황을 어떻게 대변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저 좁은 원룸을 벗어나 우리 남매에게 조그마한 방 하나가 더 생겼다는 사실이, 과분할 정도로 소중한 성취로 다가왔을 뿐이었다. 다시 안정기가 찾아온 듯했다. 나는 학교생활에 적응하며 우연히 가입한 오케스트라 동아리 활동에 무섭게 몰두했다.
처음 배워보는 악기였지만 다행히 소질이 있었다. 주위에서 나에게 재능이 있다며 전공을 권유할 때면, 나는 내가 대단한 천재라도 된 양 오만함에 부풀어 올랐다. 무대 위에서 쏟아지는 화려한 주파수 속에 매몰될수록, 나의 가족은 점점 흐릿한 배경으로 밀려났다. 나는 그렇게 음악이라는 커튼 뒤로 숨어 집안의 눅눅한 공기를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하지만 내가 외면한다고 해서 사라질 불행이 아니었다.
우리 남매에게는 어릴 적 경험으로 불행의 냄새를 맡는 특유의 ‘쌔한’ 감각이 생겼고, 동아리실의 열기 속에서도 문득문득 등 뒤를 스치던 그 차가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엄마가 유방암이란다."
아빠와 엄마가 나란히 앉아 얘기를 꺼냈고, 동생과 나는 그 마른 문장을 받아냈다. 그 순간, 기억의 심연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아주 오래된 장면 하나가 수면 위로 무섭게 솟구쳤다. 어릴 적, 엄마가 짐을 싸며 이제 그만 집을 나가겠다고 말했던 그 서늘한 공기가 생각났다. 그때의 엄마는 자의로 떠나려 했고, 지금의 엄마는 타의로 떠밀려가고 있었다. 형식은 달랐지만 본질은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암'이라는데, 그것은 '죽음'과 가장 맞닿아 있는 단어인데, 왜 내 안에서는 아무런 감정의 파동도 일지 않는 것일까. 눈물은커녕 가슴 한구석조차 아리지 않았다. 슬픔이라는 주파수가 완전히 끊겨버린 것처럼, 나는 그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부모를 응시할 뿐이었다. 이건 내 안의 어딘가, 감정을 조절하는 회로가 통째로 고장 난 것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너무 큰 공포는 감정을 마비시키는 걸지 모른다.
암세포가 엄마의 몸을 갉아먹기 시작하면서 엄마의 영혼도 함께 허물어졌다. 몸이 쇠약해진 엄마는 막내 외삼촌을 따라 이름 모를 종교에 귀의했다. 나는 예수나 부처의 이야기는 좋아하지만, 종교 그 자체는 믿지 않는다. 종교란 결국 본인 스스로가 약해서 기댈 곳을 찾는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 그때의 엄마는 지독하게 약한 사람이었다. 보이지 않는 신에게라도 매달려야만 하루를 견딜 수 있을 만큼 엄마라는 세계는 이미 형체도 없이 으스러져 있었지만, 자만에 빠진 나는 그 처절한 신호를 읽지 못했거나 혹은 읽지 않았다.
추락은 예고 없이, 그러나 필연적으로 닥쳤다. 고등학교 3학년, 인생을 걸었던 중요한 대회에서 나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나의 재능을 과신한 나머지 준비는 소홀했고, 무대 위에서 나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은 나의 실수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비난보다 더 무거웠다. 나는 그저 조용히 고등학교 생활을 끝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대학교는 원래 하려던 방향대로 진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수업에 잘 가지 않았다. 필수 교양이나 전공 수업이 아닌 이상, 이유 없이 학교에 앉아 있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 무기력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때의 나는 알 수 없었다.
그 사이 엄마는 항암 치료를 통해 완치 판정을 받았다. 다행이었다. 이제 매일 번갈아 쓰던 비니 두 개가 필요 없을 정도로 머리카락이 자랐다. 엄마를 지탱해 주던 종교 단체에서는 엄마에게 일자리도 만들어 주었다. 엄마는 그렇게 한동안 그 일에 몰두하며 다시 삶의 주파수를 잡는 듯 보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엄마가 다시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재발이었다. 엄마는 더 이상 치료받기 싫다고 버텼지만, 결국 다시 치료를 받기로 했다.
엄마는 병원 입원을 앞둘 때면 늘 내 손에 현금 2만 원을 쥐여주었다. 동생과 치킨이라도 사 먹으라는 그 평범한 당부. 좀도둑조차 볼일 없다며 저금통의 500원짜리 동전만 털어갔던 그 비좁은 원룸 시절에도, 엄마는 그 동전 주머니를 지켜내며 우리를 먹였다. 그 500원의 무게를 알던 엄마가 이제는 2만 원이라는 거금을 건네고 있었다. 그것이 엄마의 삶을 조금씩 깎아 만든 작별의 신호였다.
그 신호를 본능적으로 감지해서였을까. 어느 날 밤, 나는 문득 자다 일어나 엄마에게 안겨 자장가를 불러달라고 했다. 초등학교 때 엄마의 품 안에서 듣던 그 노랫소리가 갑자기 미치도록 그리웠다. 엄마는 오랜만에 불으려니 가사가 기억이 안 난 다며 이제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커진 나를 가만히 안고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어릴 적 그때와 똑같은 낮은 목소리다.
정말 아무런 일 없이
조용히 지나갈 것 같은 어느 날 저녁이었다.
여느 때처럼 자기 전 앉아서 휴대폰을 보고 있는데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동생과 함께 빨리 택시를 타고 오라는 목소리. 나는 그 순간 엄마의 상태를 직감했다.
우리를 태운 택시 기사님이 내릴 때 무어라 위로의 말을 해주셨는데 그때부터 기억이 흐릿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대학병원에 있던 엄마가 왜 갑자기 요양병원에 와 있는 건지도, 모든 것이 이상하고 비현실적일 뿐이였다.
낯선 문을 열었다.
엄마는 아빠와 단둘이 있는 병실에서
이미 홀로 숨을 거둔 뒤였다.
차갑게 식어버린 엄마의 무표정한 손을 잡고 나는 무너져 내렸다. 엄마의 마르디 마른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던가. 적어도 그때 엄마의 표정은 슬퍼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도 엄마의 마지막 순간은 잘 기억나지 않고, 오직 낯선 병원 직원의 기분 나쁜 그 목소리만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주변에 어른들 있으니 소리 내서 울지 말아라."
나는 그 말에 폭발했다. 어떻게 엄마가 죽었는데 참으라고 할 수 있느냐며 더 크게 소리 내어 울었다. 엄마와 마지막 대화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고, 그 기회를 앗아간 아빠가 죽도록 원망스러웠다. 나는 엄마의 죽음과 함께, 아빠라는 이름도 내 인생에서 영원히 손절하고 싶었다.
장례식장,
누군가 엄마에게 편지를 적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읽으라고 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뗐다.
"엄마는 괜찮을 줄 알았어,
다시 그냥 다 나아서,
다시 우리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어.
미안해,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