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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Apr 07. 2022

‘조용한 희망 (Maid)’, 폭력의 사이클

<누워서 쓰는 글>

매거진 제목대로 나는 글을 침대에 누워서 쓴다. 엄지로 누워서 쓰는 글이다. 밤 11시, 노트북을 다시 열고 글을 쓰기엔 나는 너무 지친 직장인이다. 그래서 앞으로 이 매거진에 쓰는 글은 내가 누워있을 때 스마트폰으로 쓰는 글이다.


글을 안 쓴지 120일이 넘었다고 브런치가 빚쟁이처럼 글쓰라고 독촉한다. 그러다가 고단한 인생 때문에 글쓰기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잡지 못한, 가정 폭력 때문에 날개가 꺾인 스물 다섯살 알렉스 이야기를 넷플릭스에서 봤다.


줄거리는 네이버, 구글에 잘 나와있을테니 생략. 알렉스는 가정 폭력 피해자다. 가정 폭력은 정의는 폭넓어야 한다. 가족인 가해자가 물리적 폭력을 가해야만 가정 폭력이 아니다. 얼굴에 멍이 들지 않아도, 가슴에 멍이 들게 하면 그것은 폭력이다. 영어로는 emotional violence. 감정적 폭력. 알렉스는 감정적 폭력 피해자다. 알렉스의 파트너인 션은 술을 마시면 벽을 치거나 그릇을 던지고 알렉스 주변 물건을 부수는 식으로 폭력을 휘두른다.


언제 맞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다가 알렉스는 딸 메디를 데리고 도망쳤지만 처음에 그는 자신이 가정폭력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로 가라고 권하는 사회복지사를 보고 “거기엔 ‘진짜’ 가정 폭력 피해자가 가야지 내가 그들의 기회를 빼앗아서는 안된다”고 선을 긋는다. 그때 시니컬한 사회복지사는 “진짜 가정 폭력 피해자?”라고 되물으며 알렉스에게 리플렛을 하나 권한다. 가정 폭력이 뭔지 다시 공부하라는 뜻이다.


출처: 넷플릭스


어쩌다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해외 여성 정책을 3년 넘게 조사하면서 배운게 있다. 영국에서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의 절반 이상이 남편이나 연인에게 목숨을 잃었다. 기사 참고: https://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51354.html ​가장 가까운 사이가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되는 아이러니다. 그리고 영국은 가정폭력의 정의를 폭넓게 본다.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교묘한 경제적, 심리적 통제도 가정 폭력으로 본다. 드라마에서 션이 딱 그랬다. 알렉스가 돈이 없어 폰요금을 빌려달라고 부탁하자 “니가 왜 폰이 필요해? 전화 올 때도 없잖아. 내 폰 같이 써”라고 통제하고, 알렉스에게 “경제 관념이 없다”고 신용카드를 주지 않고 (경제권 압수), 알렉스 친구가 빌려준 차도 “꼴보기 싫다”며 자기 맘대로 반납해 알렉스의 이동권을 제한했다. 이 숨막히는 삶이 바로 가정 폭력이다.


출처: 넷플릭스


이 드라마가 좋았던 것은 이 애매한 가정 폭력의 경계를 다루고 있어서다. 션에게 맞은 적이 없어서 자신은 가정 폭력 피해자가 아니라고 하던 알렉스처럼, 우리나라를 포함한 많은 나라의 가정 폭력 관련 법이 딱 이 정도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또한, 알렉스가 피해자 쉼터에 머무를 때 자기에게 큰 도움이 된 대니얼은 목을 졸라 죽이려 했던 남편 곁으로 다시 돌아간다. 쉼터 사회복지사 데니스도 대니얼이 남편에게 돌아간게 벌써 “세번째”라고 했을 때 알렉스는 놀란다. 대니스도 폭력적인 남편을 떠나는데 “다섯번의 시도”가 필요했다고 한다.


가정 폭력의 사이클. 피해자들이 폭력적인 파트너에게 돌아가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100퍼센트 악인인 가해자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션은 다정하고 책임감 강한 모습과 폭력적이고 통제적인 모습을 동시에 가진 캐릭터다. 알렉스의 엄마가 큰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두 발벗고 나서 돕고, 션의 책임감 있는 모습과 갈 곳 없는 자기 처지 때문에 알렉스는 다시 션의 집으로 돌아가고, 또 폭력의 사이클이 반복된다. 그리고 다시 빈손으로 매디를 안고 도망쳐 피해자 쉼터를 두드린다. 두번째 탈출이다. 대니얼이 자신을 죽이려한 남편에게 돌아갔을 때 고개를 저었던 알렉스가 똑같은 사이클을 반복한 것이다.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알렉스는 복이 많다. 1) 젊고 2) 건강하고 3) 글쓰기 재능이 있고 4) 주변에 조력자가 많아 폭력의 사이클을 벗어나고 양육권을 쟁취해 새 삶을 산다. 그것은 알렉스가 가진 끈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방법을 찾으려는 그의 생활력,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보듬을 줄 아는 삶의 자세 때문일 것이다. 물론 드라마 중간 중간 잘못된 선택으로 내 분통을 터지게 하고, 제4화에서 레지나 집을 청소한 뒤 욕조에서 샤워하고, 틴더로 낯선 남자를 불러서 자기집 행세를 할 때는 드라마를 여기서 멈춰버리려고 했었다. 도덕적인 척하던 알렉스가  직업 의식을 저버리는 것이 이해가 안돼서였다. 간땡이가 얼마나 부었으면 남의 집에 모르는 남자를 초대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이 드라마를 끝내길 잘했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가난한 싱글맘의 삶이 정말 내 마음을 저리게 했다. 알렉스가 노숙을 했을 때 몹쓸 일을 당하지 않은 것이 나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 작가가 최악의 상황으로 알렉스를 몰고가진 않아서 다행ㅋㅋ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더 많은 가정 폭력 피해자들이 폭력의 사이클을 끊고 벗어날 수 있도록 사회가 바꼈으면 좋겠다.


덧붙임: 오늘 처음으로 침대에 누워서 글을 하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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