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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Feb 18. 2024

이민자의 정체성 <Fly me to the moon>

소심하게 비평합니다

홍콩 감독 사샤 척의 첫 데뷔작 <Fly me to the moon, 2023: 한국 개봉 미정>은 내가 오랫동안 기대했던 작품이다. 지난해 홍콩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다는 소리를 뒤늦게 듣고 예매하려고 했지만 만석이라 실패, 집 근처 독립 영화관에 상영하고 있을 때도 예매 시도를 했다가 또 실패했다. 이번에는 주말 오후 애매한 시간대에 영화관 가장 앞자리가 비어 있어서 운 좋게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예 감독의 첫 장편 독립 영화가 이렇게나 예매하기 힘들다니. 이 영화를 상영하는 홍콩 영화관의 숫자가 많지 않아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많은 홍콩인들의 이 영화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Fly me to the moon은 1997년 중국 후난성에서 홍콩으로 이민을 온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다. 이 영화는 한 자매의 성장기를 중심으로 그리는데, 1997년, 2007년, 2017년 10년을 주기로 변화하는 그들의 정체성과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1997년은 홍콩의 근대 역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해다. 1997년 7월 1일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면서 홍콩 특별행정구 정부가 수립됐고, 중국 본토에서 많은 이민자들이 유입되기 시작한 해이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 흐름을 반영하듯 영화 속 윤윤의 가족도 1997년 중국 후난성에서 홍콩으로 이민 왔다. 하지만 대도시 홍콩에서의 삶은 녹녹지 않다. 네 가족이 지낼 곳은 서로 등을 비비며 생활해야 하는 단칸방이 전부다. 후난 방언 밖에 할 줄 모르는 초등학교 3학년 (8세) 윤윤은 광동어를 쓰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윤윤의 아빠는 마약 중독자로 생계에 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윤윤의 엄마가 딤섬집, 마사지샵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어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하는 정도다.

사샤 척 감독의 Fly me to the moon. 사진 출처: https://www.filmaffinity.com/en/film401085.html



홍콩인과 본토인, 정체성의 경계에 서 있는 자매들  


이 영화를 관통하는 첫 번째 메시지는 홍콩인의 정체성이다. 유년기에 홍콩으로 이사 온 윤윤과 윤윤의 동생은 청소년기가 되면서 완벽한 광동어를 구사하지만, 여전히 홍콩인들 눈에는 '중국 본토인'이다. 고등학생이 된 윤윤이 동생에게 후난 방언으로 이야기하자 동생은 이렇게 따지듯 묻는다.


"후난 방언 좀 쓰지 마. 나 이제 홍콩 사람이야! (I'm a Hong Konger!)." 그러자 윤윤이 반박한다. "후난 사람들은 우리를 홍콩인이라고 하지만, 홍콩 사람들은 우리가 홍콩 사람이라고 생각 안 해!"


윤윤보다 더 어릴 때 홍콩에 정착한 윤윤의 동생은 스스로를 홍콩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홍콩 사람들 눈에는 중국 본토 이민자일 뿐이다. 윤윤의 동생은 학교에서 중국 본토에서 태어난 친구가 홍콩에서 태어났다고 거짓말을 한 뒤 왕따를 당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홍콩 로컬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는 '이민의 타이밍'이 홍콩인과 본토인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잣대가 된다. 홍콩인들의 뿌리는 모두 중국 본토에 있지만 홍콩에서 태어난 사람만이 홍콩인으로 인정받는 아이러니다. 홍콩인인 내 남편, 시부모님 두 분 다 홍콩에서 태어나셨지만 그 윗세대인 양가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어린 시절 중국 광동성에서 홍콩으로 넘어오셨다. 이렇게 영화는 홍콩인과 본토인을 구분하는 미묘한 차별과 윤윤 자매가 홍콩인과 본토인 경계에서 서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다룬다.


이 영화를 보면서 장만옥과 여명이 주연한 <첨밀밀, 1996>이 생각났다. 아주 어렸을 때 이 영화를 봤을 땐 남녀의 러브 스토리라고 생각했지만, 몇 년 전 남편과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이 영화는 1980년대에 홍콩에 이주한 중국 본토인들의 이민 스토리임을 알게 됐다. 여명과 장만옥이 처음 만난 그 유명한 맥도널드 신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소군(여명)은 텐진 출신이어서 광동어를 못하고, 광동성 출신인 이교(장만옥)는 광동어가 유창해 자신이 본토 출신이라는 것을 주변에 속이며 산다. 첨밀밀이 청년기에 홍콩으로 이주한 중국 본토인들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라면, Fly me to the moon은 유년기에 이주한 중국 이민자의 복잡한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윤윤 자매의 정체성은 한 언어로 정의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영화에는 후난 방언, 중국 본토의 표준어인 보통화, 홍콩에서 쓰는 광동어, 윤윤이 투어 가이드가 된 뒤 주로 쓰는 일본어, 영어 등 총 다섯 가지 언어가 등장한다. 윤윤이 부모님과 대화할 때는 후난 방언과 광동어를 섞어 쓰고, 동생과 대화할 때는 광동어를 주로 쓴다. 홍콩에서 처음 왔을 땐 보통화와 광동어가 다 같은 중국어처럼 들리고 구분되지 않았지만, 1년 반 넘게 살다 보니 이제 보통화를 쓰는 중국 본토인과 광동어를 쓰는 홍콩인이 구분되기 시작됐다 (대부분 중국 본토인들은 광동성 사람들을 제외하고 광동어를 따로 배우지 않으면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후난 방언과 광동어를 섞어 쓰는 윤윤의 자매의 모습을 보여주며 사샤 척 감독은 이들이 후난 사람과 홍콩 사람의 경계를 오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홍콩 거장 스탠리 콴 감독이 탄탄한 시나리오만 보고 제작한 작품


이 영화를 보기 전부터 나는 사샤 척이라는 여성 감독이 궁금했다. 외모만 보면 30대 초중반으로 추측되는데 Fly me to the moon이 장편 데뷔작이라는 것 외에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었다. 구글 검색, 유튜브와 팟캐스트 인터뷰를 검색하다가 알아낸 것은 홍콩 거장인 스탠리 콴 (관금붕) 감독이 사샤 척 감독과 일면식도 없었지만 탄탄한 시나리오만 보고 차기 홍콩 감독을 키우는 마인드로 제작했다는 것, 이 영화가 홍콩 정부가 유망주에게 영화 제작비를 지원하는 홍콩 아시아 필름 파이낸싱 포럼 (Hong Kong-Asia Film Financing Forum)에서 5 개상을 거머쥐며 제작비 55만 홍콩달러(한화로 약 1억원 정도)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사샤 척 감독은 2017년 윤윤의 청년기를 직접 연기하기도 할 만큼 연기력에도 손상이 없다. 탄탄한 시나리오와 연기력까지 겸비한 젊은 감독이라니. 그래서 나는 그의 차기작이 너무나 기대된다.


나는 스탠리 콴 감독의 인터뷰를 보기 전까지 이 영화가 홍콩과 중국 본토 이민자의 정체성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스탠리 콴 감독은 Fly me to the moon에는 정체성 이야기 외에도 마약 중독자인 아버지와 그를 애증하는 딸의 관계를 통해 다양한 관객들에게 보편적인 감정에 호소할 수 있다고 했다. 셀린 송 감독의 Past Lives가 캐나다 이민 전 초등학교 첫사랑과 '인연'이라는 클리세에 의존한 얄팍한 이민 스토리였다면, Fly me to the moon은 도움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며 가족에게 짐이 됐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아름다운 추억, 힘없이 늙어가는 아버지에 대한 가여움, 거기에 윤윤 자매의 정체성 이야기가 결합되면서 영화의 깊이가 잘 끓인 사골 국물처럼 깊어진다. 스탠리 콴 감독이 말한 '탄탄한 시나리오'란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하고 조심스레 숟가락을 얹어본다.


우강런 배우. 이렇게 젊고 잘생긴 사람이 60대 노인을 연기하다니..!! 사진 출처: https://focustaiwan.tw/culture/202311260003

또 다른 관람 포인트는 윤윤 아버지 역을 맡은 대만 배우 우강런 (Wu Kang-ren)의 호연이다. 위키피디아에 보니 1982년생으로 마흔한 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 1997년 젊은 아버지 역할부터 2017년 60대 노인의 역할까지 어색함 없이 해내는 것이 대단했다. 알고 보니 우강런 배우는 지난해 대만에서 권위 있는 영화상인 Taipei Golden Horse Film Festival에서 말레이시아 드라마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대만의 스타였다. 홍콩 친구 한 명에게도 Fly me to the moon 영화를 추천했더니 "우강런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만 배우 중 한 명"이라며 그의 연기력을 인정했다. Fly me to the moon이 언제 한국에서 개봉할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배급사가 옥석을 알아보고 꼭 수입해 한국의 많은 관객들과 만날 수 있게 하면 좋겠다. 이 영화는 꼭 극장에서 봐야 하는 영화다. Past lives에는 별점 2점을 줬지만, Fly me to the moon에게는 별점 5개를 주고 싶다. 2024년 1-2월에 본 최고의 영화에 Fly me to the moon의 이름을 올리며 오늘을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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