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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Feb 12. 2023

홍콩 설날

어쩌다 홍콩

이제 법적으로 부부가 된 펑씨가 내 브런치 주소를 알게 됐다. 나와 함께 보낸 시간만큼 한국어 실력이 쑥쑥 는 펑씨는 이제 어려운 비유나 관용어가 아닌 이상 웬만한 한글은 다 읽고 이해할 수 있어 브런치에 펑씨 욕은 쓰기가 곤란하다^^ 사랑해 여보~~~~


결혼한 뒤 처음으로 맞이한 홍콩의 설날은 한국과 비슷한 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았다. 추석과 함께 주요 명절은 설날은 한국인에게도 의미가 남다르지만 서양 명절과 동양 명절을 죄다 챙기는 홍콩인들에게는 1년 중 가장 중요한 명절로 여겨지는 듯했다. 중국 설의 시작은 붉은 기운과 함께 찾아왔다. 설이 시작되기 전 약 2-3주부터 쇼핑몰과 버스, 아파트가 점점 붉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쇼핑몰이 온통 빨간색으로 치장할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아파트 로비에 크리스마스 때보다 요란한 붉은 장식이 붙기 시작할 때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홍콩 설에 익숙했던 펑씨는 한국에서 첫 설을 보낼 때 설날 분위기가 안 나서 실망했다고 했다. 무슨 소리야 한국도 설날 분위기 나거든? 홈플러스, 이마트 안 가봤니? 한우 세트도 팔고, 생필품 세트도 팔고, 스팸 세트도 팔고, 온갖 설날 선물 세트가 '곧 설날이야~~~'라고 홍보하고 있는데 설날 분위기가 안 난다니... 우아하고 은은한 멋을 강조하는 한국은 홍콩처럼 빨간색으로 온 나라가 변하지는 않는다고 말해주지 못해서 지금 이렇게 글로 설명한다 (펑씨 보고 있니?)


홍콩 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라이씨'로 불리는 빨간 봉투 문화였다. 우리가 결혼한 시점이 설을 3주 정도 앞뒀을 때였는데 이것은 홍콩의 라이씨 문화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결혼 여부와 나이는 라이씨를 주는 자와 받는 자를 나누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그래서 홍콩에서는 설 즈음에 결혼할 예정인 예비부부들이 웬만하면 설 이후에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건너들었다. 내가 겪은 홍콩의 라이씨 문화와 규칙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결혼한 펑씨와 미혼이었던 펑씨를 예로 들어 설명하겠다.


우리가 준비한 라이씨

싱글 펑씨 (받는 자)

1. 라이씨 줄 일이 없음. 부모님은 물론 주변 친척들이 모두 라이씨를 챙겨줌.

2. 사촌들의 조카들에게 라이씨 안줘도 됨

3. 아파트 경비 분들 챙겨드려야 함  

4. 해외에 있으면 부모님이 친척들에게 걷어서 나중에 송금해 줌


결혼한 펑씨 (주는 자)

1. 라이씨 봉투만 60개 정도 준비함  

2. 부모님, 주요 친척 어르신, 사촌들 조카, 친한 친구 자녀들에게 라이씨 줘야 함

3. 미혼인 사촌들!!!! (제일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다)

4. 나이 어린 친구들

5. 직장에서 가깝게 지내는 후배 동료들에게 챙겨줘야 함 (빈 빨간 봉투를 받았을 경우. 빈 봉투를 받고 라이씨를 안주면 내가 당신을 싫어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함.. 참 복잡하다)

6. 아파트 경비 분들 챙겨드려야 함.  


우리가 머물렀던 호텔에 달려있던 설날 장식. 이건 예쁜 축에 든다

홍콩의 라이씨 문화는 중국 본토의 빨간 봉투 문화와도 많이 다른지, 중국 본토 출신이 대부분인 나의 박사 친구들도 헷갈려했다. 라이씨 문화는 집안 분위기에 따라서 유사하게 달라질 수도 있다고 하는데, 펑씨네 집안은 주로 결혼을 기점으로 받는 자와 주는 자가 갈리는 듯했다.  


어마무시한 아파트 설날 장식

봉투에는 얼마가 들어있을까? 펑씨 집안 기준으로 친척들이 주고받는 라이씨에는 100달러 (한국 돈으로 17000원 정도), 중간 사이즈 봉투에는 50달러 (아파트 경비 분들에게 주는 봉투), 가장 작은 봉투에는 20달러가 들어간다. 한국에서 세뱃돈을 줄 때 부부 기준으로 하나씩 주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홍콩에서는 부부가 각각 하나씩 총 두 개를 준다.


재밌는 점은 받는 자가 주는 자에게 먼저 와서 덕담을 건넨다는 것이었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부자 되세요~"라는 멘트를 주는 자에게 와서 먼저 하는데, 앞서 설명한 기준대로 준비한 빨간 봉투를 주면서 "공부 열심히 해라" "건강해라" 이런저런 덕담을 다시 건넨다. 하지만, 펑씨네 사촌 조카들은 부끄러움이 많아서 외국인 이모 또는 고모인 나에게 오지 않고 멀찌감치 숨어 있는 바람에 내가 먼저 가서 라이씨를 주고 엎드려 절을 받았다. 아이들에게 라이씨를 주자 덕담인 듯한 광동어가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우리가 라이씨를 챙겨야 할 사람들 중에서 시어머니가 가장 강조한 사람들은 아파트 경비 분들이었다. 우리 아파트의 경우 2교대여서 낮시간에 한 분, 밤시간에 한 분 총 두 분의 경비가 계시고, 환경 미화를 담당하시는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 한 분이 계신다. 시어머니는 아파트 경비 분들에게는 50달러가 담긴 봉투 두 개를 각각 준비해서 감사를 표해야 1년이 편하다고 하셨다. 시어머니의 조언대로 설이 되자마자 경비 분들에게 챙겨드렸는데 원래도 친절하신 경비 분들이지만 한동안 더더욱 친절해지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받았다.


나는 라이씨 문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펑씨가 줘도 그만, 안 줘도 그만이라고 한 애매한 관계의 사람들에게도 라이씨를 쏘기 시작했다. 시부모님 아파트에 갈 때마다 우리 택시를 잡아주는 남의 아파트 경비 분께도 20달러가 든 라이씨 하나, 나보다 다섯 살은 어릴 것 같은 요가 학원 선생님께도 라이씨 하나, 같은 연구실 중국 친구에게도 라이씨를 하나 줬다.


앞으로 우리는 언제까지 라이씨를 줘야 할까. 홍콩 친구들 이야기에 따르면 자식을 낳아서 자식이 아장아장 걸어 다니며 우리가 뿌린 돈을 친척들에게 걷으러 다닐 때까지 기다려야 한단다! 평 씨의 사촌들도 미혼인 펑씨에게 이때까지 주기만 했는데 펑씨와 내가 결혼하면서 우리의 신분이 주는 자로 바뀌자 그때부터 수거에 돌입했다 (나는 그때서야 펑씨가 한국에서 4년 넘게 살면서 라이씨를 간접적으로 수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복잡하고 재밌는 라이씨 문화. 앞으로 펑씨와 나는 아장아장 걷는 자식이 생길 때까지 우리는 매년 수십 개의 라이씨 봉투를 준비해야 한다. 한국에 계시는 아빠와 내 친조카까지 챙겨야 하니 앞으로 설 즈음에는 허리를 잔뜩 졸라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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