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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May 09. 2023

더 글로리가 중국에서는 불가능한 이유

어쩌다 홍콩 

요즘 한동안 브런치에 글 쓸 힘이 없었다. 1월 초에 시작한 2학기가 너무나도 힘들기도 했고, 수업은 두 개 밖에 없는데 매주 A4 용지 최소 두 장 분량 숙제를 일요일, 화요일 두 차례, 1월부터 4월까지 내다보니 과제를 하고 다면 다른 글을 쓸 힘이 없었다. 다행히 5월 초에 에세이 두 개를 다 제출하면서 2학기가 드디어 끝났고 당분간 남들 일하는 시간에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게 됐다! 


모처럼 깨끗한 내 책상. 마감이 다가오면 똥줄이 타서 글이 잘 써진다. 



마지막 에세이를 제출하자마자 반친구 S와 커피 약속을 잡았다. S는 풀타임 박사 동기 8명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그렇지만 나와는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언니로 나처럼 사회생활 짬밥이 있고, 나처럼 영국에서 석사했고, 결혼 선배이기도 해 제일 말이 잘 통했다. 처음에 S와 가족 이야기를 하다가 일곱 살짜리 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번 놀랐고, 미국에 두번째 석사 공부를 하러 갈 때는 가족들을 중국에 두고 혼자 공부하러 갔다고 해서 두 번 놀랐다. 또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24시간을 30시간처럼 활용하는 그의 부지런함에 세 번 놀랐다. 아침 8시, 8시 30분에도 겨우 일어나는 저녁형 인간인 나로서는 새벽형 인간에 최적화된 S의 생활 태도가 부러우면서도 신기했다. 


이렇게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 S도 유명한 한국 드라마는 다 챙겨보고 있었다. S는 나를 볼 때마다 더 글로리 이야기를 했고, 이날 커피 데이트를 하면서도 백상예술대상에서 더 글로리로 임지연과 송혜교가 상을 받았다는 깨알 같은 최신 정보를 공유하며 더 글로리 사랑을 드러냈다. 박사 공부의 어려움을 토로하던 대화는 어느새 의식의 흐름에 따라 더 글로리와 한국과 중국의 콘텐츠 시장으로 옮겨갔다. 요즘 한국에는 더글로리, 모범택시처럼 법만 따라서는 절대 구현되지 않는 사회 정의를 사적 복수로 통쾌하게 실현하는 게 유행이라고 하자 S는 그래서 한국 콘텐츠가 재밌다고 했다. S의 결론은 동은이가 부모 같이 않은 부모를 응징하고, 부패한 경찰이 경찰 조직의 구조적 결함을 이용해 사적 이익을 취하고, 사적 복수를 달성하는 더 글로리 같은 콘텐츠는 나오기 어렵다고 했다. 특히, 더 글로리의 전제는 현행 법이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데 실패했다는 건데 이런 전제를 한 드라마는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비치기 때문에 정부의 검열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S는 말했다. 


"만약에 더 글로리 같은 드라마를 중국에서 만들려고 하면 여러모로 수정을 거쳐야 할 거야. 일단, 드라마에서는 동은이가 통쾌하게 부모 같지 않는 엄마를 정신병원에 처넣잖아? 중국에서는 가족의 화합이 중요하니까 동은이가 엄마를 용서하고 두 사람이 포옹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겠지. 그리고 드라마에 부패한 경찰이 나오기 어렵겠지만, 만약에 드물게 나온다면 개인의 일탈, 부패로 잘 포장해야지. 그리고 그 경찰은 체포가 돼서 법으로 엄중하게 처벌받으면서 현행법으로 사법 정의를 실현할 거고." 


S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중국식으로 수정을 거친 더 글로리는 사이다 같은 맛이 덜하고, 약간 진부해졌다. 특히, 동은이가 미친 엄마를 정신병원에 처넣을 때 통쾌함이 상당했는데 갑자기 엄마를 얼싸안고 용서하는 것으로 결말이 끝난다면 스토리 전개가 매끄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S와 나는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까탈스러운 한국 관객과 드라마 시청자들의 피드백을 받으며 한국의 콘텐츠 경쟁력이 성장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S는 중국 콘텐츠가 과거보다는 용감해졌다고 말했다. 그 예가 바로 영어로 The Knockout이라고 번역되는 범죄 드라마다. 몇 달 전 반 친구들이 지금 전 중국인이 보는 드라마가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 드라마였다. 중국경찰이 범죄 조직과 싸우는 내용으로 S에 따르면 드라마 속에 범죄 조직과 유착한 부패 경찰과 관료들이 등장한다. 물론, 드라마의 큰 주제는 범죄 조직을 소탕하는 중국 경찰의 위대함이지만 그래도 부패한 공무원이 등장하는 드라마는 과거 중국 콘텐츠  시장에서 보기 드물었다고 했다. 한국 드라마 영화에선 대통령도 부패, 국회의원도 부패, 기자도 부패, 경찰도 부패, 공무원 부패가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지는데 말이다.  


중국 범죄 드라마 The Knockout.  사진 출처: Sixth Tone


과거보다 느슨해진 중국 콘텐츠 검열과는 달리 중국 정부의 홍콩 통제는 점점 더 엄격해지는 듯하다. 지난주에 홍콩에서 가장 이슈가 된 정치 뉴스는 한국으로 치면 시, 구의원 정도 번역되는 district councillor 의석의 80%가 앞으로 홍콩 정부가 임명하는 방식으로 선출된다는 것이었다. 즉, 지금까지는 district councillor 452석 모두가 시민이 투표를 통해 선출했지만, 앞으로는 이중 20%인 71석만 홍콩 시민이 투표로 뽑고 나머지는 정부가 임명하는 방식으로 뽑는다는 뜻이다 (아래 기사 참고). 지금까지 홍콩에서 구색 맞추기 식으로 존재하던 민주주의 선거가 이제는 더 노골적으로 사라지고 있다. 


https://www.scmp.com/news/hong-kong/politics/article/3219035/only-20-cent-hong-kong-district-council-seats-could-be-directly-elected-under-proposed-overhaul


2학기 수업 시간에 중국 정치에 관해 토론한 적이 있다. 토론 주제는 왜 독재 정권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정보와 비판을 100% 검열하지 않고 허용하냐는 것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지만 관련 논문과 책을 읽고 얻은 결론은 독재 정권은 '집단행동 (collective action)'을 통해 체제 전복 가능성이 있는 비판은 적극적으로 검열하고, 정부를 향한 단순 비판은 사람들에게 제한된 자유를 주고 시민들의 불만을 취합하는 정보 수집 채널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2019년 홍콩 시위는 강력한 집단행동으로 체제에 도전하는 비판이기 때문에 무력으로 진압하고, 중국 범죄 드라마 The Knockout에 등장하는 몇몇 부패 경찰은 체제 전복 가능성이 거의 없는 위협적이지 않는 비판이기 때문에 중국 정부가 허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박사생은 어쭙잖게 현실 정치를 정치 이론으로 분석해 보며 오늘의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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