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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Mar 30. 2023

홍콩인의 한국식 사고

어쩌다 홍콩

"홍콩 사람들이 중고 거래 매너가 없어."


이케아 책상 무료 나눔 중고 거래를 한 뒤 남편이 한 말이다. 누가 보면 자기는 홍콩인 아닌 줄 알겠다. 홍콩인 내 남편 펑씨는 한국에서 4년 반을 넘게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한국화가 서서히 진행된 듯했다. 홍콩으로 이사오기 직전 펑씨는 주방 용품을 다 묶어서 당근으로 한꺼번에 무료 나눔 했는데, 그때 감사함을 표하고 가져가셨던 아주머니를 떠올리는 듯했다. 사실 나도 조금 놀랐다. 무료 나눔을 하는데도 당연하게 무거운 책상을 1층 로비까지 내려달라고 한다거나,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선심 쓰듯 책상을 가져가는 태도는 조금 놀라웠다. 시아버님께 여쭤보니 책상을 무료로 가져가면서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은 그 사람의 심리는 "자신이 쓰지 않는 너희들의 책상을 가져가니 오히려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나보다 당근 온도가 높았던,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당근 온도가 45도가량 됐던 펑씨에게 한국 생활을 하면서 가장 그리웠던 것이 뭐냐고 물으면 항상 두 가지를 말한다. 쿠팡과 당근. 쿠팡이 좋은지, 당근이 좋은지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곤란해할 정도로 펑씨의 한국 생활에 쿠팡과 당근은 큰 획을 장식했다.



당근이 펑씨의 삶 속에 들어오면서 그의 삶은 분주해졌다. 파스타 면 뽑는 기계를 사러 자전거를 타고 선유도역까지 직거래를 하고 오던 펑씨, 갖고 싶은 이케아 트롤리가 당근에 떴다며 마포역까지 나를 끌고 갔던 펑씨, 무료 나눔으로 나온 소파를 찜해서 또 공덕역으로 (또 나를 데려가서) 픽업해 온 펑씨. 펑씨의 당근 초반기가 싼 중고 물품을 사는데 초점을 맞췄다면 한국어에 자신감이 붙은 당근 후반기에는 본격적으로 팔기에 집중했다. 잘 안 듣는 레코드부터 CD, 기타, 가구 등등 외국인의 완벽하지 않는 한국어로 로컬들과 소통하면서 나의 도움 없이도 무서운 속도로 당근 온도를 올려가기 시작했다. 한 번은 구매자와 이런 문자를 주고받는 것을 보고 빵 터지고 말았다.


(펑씨와 거래 성사가 확정된 뒤 장소를 논의하는 중인 것 같았다)

구매자: 네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외국인세요?

펑씨: 네, 홍콩 사람입니다!


펑씨의 당근 채팅 기록을 보면 묘~~ 하게 한국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있었는데 그 구매자가 캐치한 것이다. "구매 가능해요~~" "할인할 수 있어요" "살 수 있어요" 등등 문법은 맞지만 묘하게 한국인의 한국어가 아닌 느낌.. 그 구매자는 물론 펑씨에게 "한국말 엄청 잘하시네요!"라며 칭찬을 하며 채팅을 마무리했지만, 나는 혼자 배를 잡고 웃고 말았다.


펑씨가 빠진 중고 거래는 당근만이 아니었다. 당근에 익숙해진 펑씨는 한국인인 나도 아직 해보지 않은 네이버 카페 거래로 영역을 확장했다. 복싱 학원을 다니면서 유명한 네이버 복싱 카페에서 비싼 복싱 글러브와 장비를 저렴한 가격에 중고로 살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펑씨는 내 도움 없이 카페에 가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온라인 카페에 가입해서 중고 거래를 하기까지 정회원 등업이라는 어마어마한 산을 넘어야 한다. 댓글 10개, 게시글 3개 등등 구체적인 요구 사항을 맞춰야 게시글을 볼 수 있고, 중고 거래 물품을 사고 팔 수 있다고 하자 처음에 펑씨는 내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직장인은 회사 일만 하고 나면 진이 빠지는데 구 남친 현 남편의 복싱 카페 등업까지 도와줄 만한 에너지가 없었다. 이러한 힘든 규정 때문에 나도 카페 가입을 잘 하지 않는다. 좌절한 펑씨는 절실했는지 혼자서 댓글을 달고, 게시글도 쓰기 시작한 뒤 (무슨 게시글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정회원이 돼버렸다. 혼자의 힘으로!! 그 뿌듯해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등업이 된 뒤 중고 거래 물품 게시글을 볼 수 있게 된 펑씨는 겁도 없이 수십만 원이 넘는 현금을 계좌이체로 보낸 뒤 갖고 싶어 했던 복싱 글러브를 중고로 싼 값에 샀다. 처음에는 사더니 나중에는 자기 복싱 용품을 팔기도 하고, "복싱 카페에 취미를 바꿔서 거의 새 글러브를 파는 사람도 많다"면서 암튼 외국인이면서 한국인보다 더 적극적으로 중고 거래를 하며 한국 생활을 만끽했다.


펑씨가 홍콩에 온 뒤 당근 다음으로 그리워하는 것은 온라인 쇼핑이다. 사실 한국은 쿠팡을 비롯한 온라인 쇼핑몰 덕분에 익일 배송, 당일 배송이 새롭지 않다. 하지만 홍콩에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온라인 쇼핑이 거의 2000년대 초반 한국과 비슷한 것 같다. HKTV 몰이라는 온라인 쇼핑 시스템이 있지만, 당일 배송은 커녕 최소 이틀은 기다려야 배송이 되고, 300-500 홍콩달러 이상 구매해야 배송비가 무료가 되는 아주 고전적인 시스템이다. 홍콩에 돌아온 뒤 펑씨는 온라인 쇼핑을 할 때마다 "한국에서는... 한국에서는..."이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나도 한국에서 일주일에 두세 번 이상 사용하던 온라인 쇼핑을 홍콩에서는 온라인 쇼핑몰 물건이 더 비싸기도 하고 기다리는 게 지쳐서 웬만하면 하지 않는다. 펑씨는 홍콩에 왜 온라인 쇼핑이 이렇게 제대로 발전하지 않았는지 한번 조사해 보겠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깜깜무소식이다.


대중교통을 탈 때도 펑씨는 종종 한국 타령을 한다. 홍콩 버스는 배차 간격이 정확하지 않다, 구글 맵은 못 쓰겠다, 네이버 맵은 정확한데 등등... 지금은 덜하지만 처음에 홍콩에 왔을 땐 들쑥날쑥한 홍콩의 버스 배차 시스템을 한국과 비교하며 여러 번 비판하셨다. 한국 음식은 안 좋아한다고 하면서 간장 게장과 보리 굴비, 냉면, 잡채, 소고기 김밥을 좋아하시는 펑씨. 한국 음식 그냥 그렇다고 하면서 "이번에 한국 가면 냉면 삼겹살 소고기 간장게장 먹으러 가자"라고 하는 펑씨. 또 그러면서 월드컵 볼 때 대한민국 응원하는 펑씨. 한국을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좋아하는데 부끄러워서 안 좋아하는 척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때 펑씨는 한국인인 나를 좋아하고, 임금님이 드시던 고급 한국 음식을 좋아하고 (떡볶이, 매운탕 제외), 한국인의 예절과 한국의 효율적인 시스템을 좋아한다.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응원하던 펑씨에게 "당신은 누구신데 홍콩인이 왜 대한민국을 응원하시냐"라고 물었더니 "한국 여자와 결혼했으니 대한민국 응원하게 해 주세요"라는 정중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내가 허락해 줄게. 홍콩이 올림픽 본선에 올라올 때까지 앞으로 월드컵에서는 같이 대한민국을 응원하자. 그 대신, 이제 한국 음식 좋아한다고 제발 인정해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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