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홍콩
내가 클라이밍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2021년 2월 자카르타에서였다. 코로나가 한창 활기를 쳤을 때라 재택근무 이후 헬스장과 수영 외엔 할 게 없었고, 어쩌다 우연히 2019년 한번 경험해 본 실내 클라이밍장이 생각났다.
자카르타 쇼핑몰 3층인가 4층인가 애매한 공간에 위치하고 있는 클라이밍장은 무료했던 자카르타 내 인생의 한줄기 빛과 같았다. 내가 다녔던 클라이밍장에는 멤버십을 가입하면 무료로 지구력벽에서 기본 테크닉까지 익힐 수 있는 알찬 시스템이 있었다. 내가 클라이밍에 푹 빠지도록 밑밥을 깔아준 사람은 영어가 유창한 A 선생님이었다. A쌤은 무조건 잘한다는 칭찬보다 초보자인 나의 클라이밍 자세 교정에 집중했고, 지구력벽 훈련이 끝나면 꼭 팔 운동을 하고 가라고 잔소리도 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강사들은 레이저 펜으로 내가 다음에 잡아야 할 핸드 홀드, 발을 딛어야 할 풋 홀드 알려줬는데, A 선생님은 처음 몇 번은 레이저로 알려준 뒤 그 다름부터는 “비주얼리제이션이 중요해. 내가 알려줄 수도 있지만 네가 스스로 기억해서 다음엔 어떤 홀드를 잡고 발은 어디에 딛어야 하는지 계산해 봐”라며 클라이밍 초보자를 훈련시켰다. 내가 쉬운 루트를 잘 해내지 못하면 ‘벌칙’으로 매달리기 팔 운동을 시키는 독한 강사였다.
약 한 달간 일주일에 세 번 정도 클라이밍장에 출석했다. 클라이밍에 재미가 한참 붙었을 때 매번 빌려 신던 클라이밍화를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도 나의 A 선생은 “클라이밍화는 자기 발보다 작게 신는 게 좋아. 그래야 작은 홀드를 밟을 때 안전하다”며 내 기준에 조금 비싼 ‘테나야 오아시’라는 클라이밍화를 추천했다. 우리 돈으로 15만 원이 넘는 225 사이즈 (내 발 사이즈는 235다) 클라이밍화는 지금까지도 잘 신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자카르타 클라이밍장은 다시 갈 수 없게 됐지만, A 선생님에게 클라이밍 기초를 잘 배운 덕분에 클라이밍에 재미를 붙이고 지금까지 꾸준히 하고 있다.
클라이밍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다. 빨리 올라가는 스피드 클라이밍, 안전 장비 없이 오르는 볼더링, 안전 장비를 하고 높이 오르는 리드 클라이밍. 내가 하는 클라이밍은 다양한 문제를 머리를 써서 푸는 볼더링이다. 아직도 클라이밍을 잘 하진 못하지만 볼더링을 2년 하면서 내가 깨우친 것은 낙법의 중요성이다. 클라이밍에는 다이내믹 무브먼트라고 해서 영어 뜻 그대로 역동적으로 점프를 하거나 뛰어서 홀드를 잡는 재밌는 테크닉이 있다. 나도 클라이밍 초보자에서 실력이 조금 늘면서 다이내믹 무브먼트의 맛을 알아버렸고, 클라이밍을 본격 시작한 지 딱 1년 2개월 만에 다이내믹 테크닉을 쓰다가 착지를 잘못해 팔이 부러지는 큰 사고를 당했다. A 스승이 절대로 팔로 착지하지 말라고 했는데…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경험이다. 이날 이름도 모르는 클라이밍장 직원을 보호자 삼아 구급차에 실려 처음으로 응급실에 가보았다. MRI를 찍어보니 팔꿈치 쪽 뼈가 완전히 부러진 것은 물론, 야구 선수들이 주로 부상을 당한다던 내측측부인대가 80% 이상 파열돼 첫 번째 병원에서는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주변인들의 조언을 듣고 찾은 두 번째 큰 병원에서 보조기만 잘 착용해도 뼈와 인대는 잘 붙을 것이라고 해서 4개월 치료를 받은 끝에 수술 없이 완전히 팔꿈치 부상을 회복했다는 해피엔딩!!!
클라이밍의 매력을 무엇인가. 이렇게 팔이 부러져 개고생을 한 뒤에도 나는 또 벽을 타고 있다. 주변에 나를 걱정하는 친구들은 내가 정신이 나갔다며 혀를 차지만, 부상 이후 나는 새로운 규칙을 세웠다. 1) 5번 이상 시도해서 풀 수 없는 문제는 집착하기 말 것, 2) 내 실력보다 어려운 문제는 피할 것 3) 다이내믹 무브먼트는 되도록 하기 말고 머리를 써서 스타틱 무브먼트 (뛰지 않고 홀드 잡기)로 문제를 풀 것.
내가 생각하는 볼더링의 가장 큰 매력은 다양성이다. 다시 말하면 문제를 푸는 방식이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근력이 좋고 키가 큰 남자들이 쉽게 푸는 문제를 보통 여성의 근력과 키를 가진 내가 같은 방법으로 풀 수 없다. 나의 장점과 한계를 인정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야 탑 홀드를 잡을 수 있다. 나와 키가 비슷한 여성 클라이머가 문제 푸는 방식을 베낀 적도 있는데, 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었다. 서로의 몸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장 뿌듯할 때는 남들을 따라 하지 않고 나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서 탑 홀드를 잡을 때다. 볼더링은 꼭 우리 인생 같지 않은가. 남들 사는 대로 살 필요가 없다. 나에게 맞는 방식, 나에게 맞는 속도대로 문제를 풀듯 인생도 살면 된다.
나는 홍콩에서도 계속 클라이밍을 한다. 박사과정 친구에게 클라이밍 전도를 해 성공했고, 그녀는 나보다 더 비싸고 작은 클라이밍화를 사서 매주 한번 나와 함께 볼더링을 하고 있다. 올해 목표는 인공 암장을 벗어나 자연 암벽을 만지는 것이다. 아직도 여전히 인공 암장에서 문제를 풀며 끙끙되고 있지만, 올해는 꼭 진짜 돌덩이를 만지며 완등하고 싶다. 얼마 전 우연히 찾은 바닷가에서 자연 암벽 볼더링을 하는 젊은이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자연 암벽을 구경했다. 다음번엔 꼭 그 무리에 내가 낄 수 있길. 앞으로도 다치지 않고 즐겁게 클라이밍 할 수 있길. 안전하고 행복하게 클라이밍 하며 건강하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