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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Jul 05. 2023

변화에 대처하는 자세

어쩌다 홍콩

박사 공부를 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지도 교수 교체다. 그리고 그 일이 나에게 생겼다. 나의 지도교수님은 정년이 보장되는 다른 학교의 보직으로 이동하게 됐다. 이 흉흉한 소식을 처음 전해준 사람은 우리 연구실의 학과 소식통이자 남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 B였다. 나는 원래도 연구실에 자주 가지 않는 데다 한국에서 짧은 휴가를 보냈다가 홍콩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학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B는 내 지도 교수 A가 ** 대학에서 오퍼를 받아 우리 학교를 떠날 수도 있다며 "I'm sorry to hear that"이라며 나를 위로했다. 청천벽력이었다. 만약에 확정된 사실이라면 A 교수님이 나에게 직접 분명 말씀해 주셨을 텐데, 그가 나에게 아직까지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그날 교수님을 직접 봤지만 묻지 않고 기다렸다.


다음날 교수님에게 연락이 왔다. B의 정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교수님이 다른 학교에서 이직 제안을 받은 것은 맞지만, 아직 결정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교수님은 내가 교수님이 아닌 제3자를 통해 이런 소식을 듣게 돼서 너무 미안하다며 나에게 어제까지 말하지 않는 이유는 1) 내가 휴가를 중이어서 휴가를 망치게 하고 싶지 않았고 2) 일주일 뒤 (지금은 이미 지나간) 내 컨퍼런스 발표 준비가 끝나면 어려운 이야기를 할 예정이었다고 했다. 교수님은 자신의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했고, 나도 조용히 들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나라도 덥석 잡을 좋은 이직 기회였다. 나는 교수님께 "교수님이 다른 학교로 떠나는 것은 나와 다른 박사생들에게는 최선의 상황은 아니지만, 교수님이 어떤 결정을 하든 100%로 응원한다"라고 했다. 나는 교수님의 제자지만, 직장 생활을 10년 넘게 한 사회생활 선배로서 이직이 얼마나 중요한 결정인지 알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맑은 홍콩 하늘. 내 마음은 어둡다…ㅋㅋ

몇 주 뒤 교수님은 나와 다른 박사생 J를 불러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알려주셨다. 결국 이직 제안을 받고 몇 달 뒤 떠나기로 하셨다며, 떠나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서 우리의 연구를 도와주고, 새로운 지도 교수도 연결해 주시겠다고 했다. 나는 교수님이 그 보직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년이 보장되고, 한 직급 승진하는 보직을 고사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결정을 내린 상황이었지만 교수님은 우리 생각을 물어보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전 직장을 그만두고 박사를 결정할 때 예전 직장 상사가 해주신 말씀을 공유했다.


나는 홍콩에 오기 직전 다녔던 기구에서 1년 계약을 맺고 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박사를 하기로 결정하면서 계약 기간을 다 못 채우고 중간에 떠나게 돼 여러모로 마음이 무거웠다. 회사 사람들도 좋고, 업무도 재밌어 1년 더 계약을 연장하고 박사를 1년 늦출까 잠깐 고민도 했지만, 당시엔 펑씨와 약속한 홍콩에서의 새 삶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내가 그만두기 몇 주 전 우리 기구 대표님은 나와 같은 부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점심을 사주셨다. 점심 약속을 잡아준 직장 동료는 "대표님이 직원들에게 점심을 사주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라고 하셔서 더 의아했다. 점심 식사가 끝나갈 무렵 대표님은 나에게 한 말씀하고 싶다고 하셨다. 내가 아직도 곱씹는 말이다.


"지금까지 우리 기구를 위해 열심히 일해줘서 고맙다. 함께 일해서 즐거웠다. 우리 아버지가 예전에 해주신 말씀을 너에게도 해주고 싶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좋은 결정과 나쁜 결정이 따로 없다'라고 하셨다. 모든 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결정을 한 사람이 바로 '너'라는 것이다. Do not look back. 네가 내린 결정에 최선을 다해서 살면 돼."


눈물이 핑 돌았지만 울지 않았다. 나도 내 결정이 맞는지 잘 몰라 헷갈렸던 시기였는데, 미국인 치고 무뚝뚝한 대표님이 진심을 담아 해 주신 한 마디에 더 큰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예전에 본인도 홍콩으로 파견될 뻔한 적이 있었고, 예전 비서도 홍콩 사람이었다면서, 홍콩 음식이 맛있으니 홍콩에서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해 주셨다. 내 직장 생활에서 가장 짧게 근무한 기관이었지만, 이렇게 큰 격려와 응원을 받으며 퇴사한 곳은 이 기구가 처음이었다. 퇴사하는 날, 작은 선물과 손 편지를 무뚝뚝한 우리 대표님 책상에 두고 나왔다.


나는 예전 대표님이 내게 해주신 말씀을 공유하며 교수님께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뒤돌아 보지 말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J와 나는 짧은 시간이지만 교수님과 같은 좋은 사람을 상사로 둘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고 감사함을 전했다. 입에 바른말이 아니고 진심이었다. 박사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지도 교수를 잘 만나는 일인데, 나는 운이 좋아서 인성 좋고, 똑똑하고, 성실한 교수님 밑에서 10개월간 마음 편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J와 만나서 단 한 번도, 정말로 단 한 번도 교수님을 욕한 적이 없다. 다만,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 왜 연애를 하지 않는 거냐면서, 자기 생활도, 주말도 없이 일하는 교수님이 불쌍하다고 한 적은 몇 번 있다.. 이렇게 좋은 상사를 떠나보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아쉽고 슬프지만, 예전 대표님이 나를 응원하며 떠나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우리 교수님의 결정을 응원하고 싶다. 나는 좋은 직장 상사를 두 명 연속으로 만나면 그다음 직장의 상사가 별로인 징크스가 있는데 (그래서 2년간 인도네시아에서 직장 생활이 너무나 괴로웠다), 이번에는 이 징크스가 깨졌으면 한다. 제발... 새 지도 교수님, 우리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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