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가 내가 자주 글을 쓰지 않으면 구독자가 떨어져 나갈 것이라며 돌려 까는 알림을 주기적으로 보내는데 이게 은근히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그 알림을 받은 지 며칠 만에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6월 말 한국에서 친한 친구가 홍콩에 와서 4박 5일 실컷 논 뒤로 나태한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매일 도서관에 나와 학업에 매진하고 있다. 자발적으로 학구열에 불타서 하는 공부는 절대 아니고 8월 말 PhD student에서 PhD candidate로 승격(?) 여부를 결정하는 박사자격시험이 있기 때문이다. 6월 말쯤부터 발등에 불이 떨어진 느낌이 들었고, 7월엔 마음이 불안해졌고, 8월인 지금은 똥줄이 타고 있다. 시험 때문에 쫄깃한 마음을 뒤로 한채 지금 나는 도서관에서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
약 두 달간 집과 도서관, 요가학원, 이렇게 세 장소만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일상이 단조로워서 크게 재밌는 일도, 놀랄만한 일도 없다. 대신, 나는 집에서 편도로 1시간 정도 걸리는 우리 학교 도서관 대신 집에서 편도로 도어투도어 20분이면 도착하는 남의 학교 도서관을 주로 이용하는 편인데, 매일 같은 도서관에 비슷한 시간에 오다 보니 도서관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1. 큰 이어폰 끼고 수학 문제 푸는 아저씨
추정 나이 67세. 왜 67세라고 추측하냐면 외모도 그렇지만 매일 평일 오전 일찍 도서관으로 출근하는 것으로 봐서 퇴직을 하신 것 같다. 퇴직 연령은 보통 65세니 내 맘대로 어르신의 나이를 67세로 추측한다. 내 친구는 그 아저씨를 보고 '이 학교 학자가 아니냐'는 가설을 제기했는데 나는 아닐 확률이 높다고 반박했다. 만약 이 학교 학자라면 독립된 연구 공간이 있을 테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쪼무라기 학생들과 한 공간에서 공부하는 걸로 봐서는 이 학교 소속 학자는 아닌 것 같고, 이 학교 출신 퇴직자가 유력하다. 나는 왜 이 아저씨가 왜 이 학교 동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학교에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학교 아님. 나는 풀타임 박사생이라 홍콩 연합 대학들 통합 도서관 카드가 있어서 다른 학교 도서관에 들어올 수 있음) 매년 일정 금액을 내면 동문들이 도서관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대출까지 받을 수 있는 서비스가 있다. 아마 그 서비스를 이용하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 또한, 아저씨는 두꺼운 책 2-3권을 받치고 노트북 화면을 항상 열심히 보고 계신데, 그 아저씨 자리를 지나가면서 종종 봤더니 복잡한 수학 공식을 풀고 계셨다. 그런데 또 내 친구의 취재에 의하면 어떨 때는 주식 차트를 보고 계신다고 했다. 도서관 출퇴근 시간도 약 두 달간 일정하다. 도서관에 9시에 출근했던 내 친구보다 일찍 오시고, 보통 낮 1시 30분쯤 도서관을 떠나신다. 어쩌면 수학 분야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에 도전하면서 취미 삼아 주식을 하는 이 학교 동문님..?
2. 본토 중국인 관광객들
나의 학교를 포함해 홍콩의 몇몇 대학들은 2019년 시위 이후 외부인의 학교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 학교 출입은 외부인에게 활짝 열려 있고, 그 덕분에 본토 중국인 관광객들의 필수 관광 코스가 된 듯했다. 내가 이 학교 도서관을 본격적으로 드나들기 시작한 3-4월 무렵만 해도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지는 않았다. 하지만 코로나 관련 여행 규제가 풀리고, 중국 본토 관광객들이 홍콩으로 유입되면서 이 학교에는 학생보다 관광객이 더 많은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발생했다. 방학인 탓도 있겠지만. 이 관광객 무리가 제일 많이 몰리는 곳은 주로 학생 카드를 찍지 않아도 밥을 먹을 수 있는 식당, 그리고 도서관 앞이다. 도서관 안에는 출입증이 없어서 외부인은 들어오지 못하니 출입증 바로 앞 에어컨이 잘 나오는 로비에서 온갖 사진을 찍는다. 여기 털썩 주저앉아서 쉬다가, 음식물을 먹다가, 음료수를 마시다가, 큰 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다가 경비 분들께 저지당하는 관광객들을 여러 차례 봤다. 도서관 규칙을 지키지 않아 한소리씩 듣는 관광객이 다수지만, 그래도 마음씨 좋은 한 경비 분은 가족 단위로 오는 관광객들 단체 사진을 자진해서 찍어주시며 훈훈한 모습을 간혹 연출한다.
나는 도서관 앞에서 혼자 도시락을 까먹다가 우연히 이 학교 학부생들과 합석하게 됐다. 22세 정도로 추정되는 이 학교 학부생 두 명과 30대 후반 남의 학교 박사생은 다시 만날 일이 전혀 없을 테지만 어색함을 물리치기 위해 "서울에 갔는데 겨울에도 다들 아아를 마시더라. 한국인은 얼음을 좋아하나 봐??"라는 류의 의미 없는 '스몰 토크'를 했고, 그때 그들은 관광객들이 인터넷에 치면 다 나오는 자기네 학교 역사 같은 설명문을 왜 열심히 사진 찍는지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볼 때 중국인이 대다수인 이 관광객들은 이 학교에 관련된 모든 것을 모조리 사진을 찍는 듯했다. 사진 촬영은 문방구에서도 이어졌으니 말이다. 아마 자식들이 공부 열심히 해서 이 학교에 오기 바라는 소망을 담아 이 학교의 역사가 담긴 설명문, 도서관 입구, 이 학교 로고가 찍힌 학용품, 계단, 에스컬레이터, 화장실을 제외한 모든 공간을 사진으로 담는 듯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보통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내가 본토 중국인처럼 생겨서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항상 나에게 보통화로 질문을 했다. 홍콩에 왔으면 광동어를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항상 당당하게 보통화를 쓰는 그들을 보면 내가 홍콩 사람이 된 것 마냥 뿌루퉁해진다. 그럴 때 나는 "sorry, I don't understand" 정도로 답하고 물러서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질문을 하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하루는 보통화를 잘하는 나의 한국 친구와 길을 가다가 중국 관광객들에게 질문 세례를 당했고, 나는 친구에게 보통화를 못 알아듣는 척하라고 했다. 나중에 친구는 "저분들 도서관이 어디냐고 묻는데?"라고 설명했다. 이놈의 도서관... 그들의 최종 정착지는 도서관이다.
3. 타이치하는 동네 주민
한국말로 하면 태극권이다. 우리 아파트에도 아침저녁으로 타이치를 하는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무리가 엄청 많다. 이 학교는 타이치를 하는 동네 주민들에게도 인기가 굉장히 많은 편인데, 특히 인문대로 추정되는 건물 앞에서 오전 10시경 많은 어르신들이 함께 천천히 타이치를 연습하신다. 왜 남의 학교에서 타이치를..? 이 건물 앞이 기가 좋다고 소문이 났나? 나도 중국 친구에게 타이치를 배워서 연습한 적이 있다. 천천히 움직이며 기를 빨아들여야 하는 것이 역동적인 태권도와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공교롭게도 이 건물에는 박사 공부를 하는 내 친구의 연구실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건물 앞 특정 입구에서 만나야 할 땐 이렇게 말한다. "타이치 입구 앞에서 만나!"
글을 쓰다 보니 벌써 1시간 반이 지났다. 이제 가방을 싸서 집에 가야 할 시간이다. 다음엔 재밌는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올게요. 여러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