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홍콩
홍콩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으레 듣는 이야기가 한국 드라마에 대한 칭찬이다. 얼마 전에 병원에 진료받으러 갔다가 30분간 긴 상담이 끝난 뒤 의사 선생님은 그제야 "나 요즘 한국 드라마 많이 보는데 정말 잘 만들어~~ 홍콩보다 훨씬 낫단 말이지. 최고야 최고!"라며 한국 드라마 칭찬을 쏟아냈다. 내가 한국 드라마 만든 것도 아닌데, 그런 칭찬을 들을 때마다 꼭 내가 만든 드라마처럼 머쓱해져서 "땡큐!"라고 웃고 만다. 요가 학원에서 오랫동안 알고 지낸 반 친구도 일주일에 한 번 만날 때마다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에 새로 뜬 한국 드라마 소개를 한국인인 나한테 하느라 여념이 없다. "마스크걸 봤어? 어때? 요즘 미씽, 미썽, 아니다. 미생!! 그 옛날 드라마 보고 있어!"라며 나한테 꼭 본인의 넷플릭스 시청 목록을 보여준다.
특히, 더 글로리가 히트를 쳤을 때는 여기저기서 "너는 더 글로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아주 많이 받았다. 나는 그냥 한국인일 뿐, 대중문화 평론가도, 영화판에 있는 사람도 아닌데, 그들은 한국 드라마를 한국인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현실을 얼마나 많이 반영했는지 구체적인 질문이 따른다. 누가 보면 내가 봉준호라도 되는 줄... 더 글로리는 속 시원하게 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지만, 부정적인 평가를 내려야 하는 드라마가 있으면 마음이 무겁다. 예를 들어 그렇고 그런 로맨스물들.. 하지만, 한국인의 진솔한 의견을 찾는 그들에게 나는 냉정한 평가를 내려야만 했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안 그렇게냐만은 홍콩에서 한국 드라마의 인기가 무섭다. 넷플릭스 탑 10 콘텐츠를 보면 여기가 한국인 것처럼 탑 5를 한국 드라마가 꿰차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전통적으로 일본 문화와 콘텐츠 인기가 많은 홍콩에서도 한류가 전세를 역전하고 있다. 우리 시어머니는 한국 드라마를 보고 한국 문화를 배워서인지 어쩔 때 저녁 먹으러 시댁에 가면 (물론 요리는 시아버지가 하시지만), "응답하라 1988에서 봤다"면서 어디서 굴비 같은 고기를 구해와 저녁상에 내놓으신다. 나는 응답하라 1988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득하게 본 적이 없어서 굴비가 등장한 지도 몰랐다. 한국 드라마가 한국 문화 전파에 열일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드라마 '무빙' 스포가 있습니다!!!>
나는 내가 먼저 나서서 한국 드라마 자랑을 하는 국뽕에 가득 찬 한국인은 아니지만, 주변에서 요즘 볼만한 한국 드라마가 없냐고 물어보면 무빙을 추천한다. '별을 쏘다' 시절부터 조인성 팬이어서 조인성 배우가 나오는 모든 영화, 드라마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결핍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강풀 원작, 극본의 무빙은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다'라고 믿는 작가의 철학이 스며든 드라마여서 그런지 잔인한 액션 신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20화를 끝까지 울다 웃으면서 재밌게 보았다. 무빙 줄거리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국가에 의해서 (국정원) 이용당하고, 그들이 나중에 자신의 초능력을 물려받은 자녀들을 낳으면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와 북한을 상대로 싸우는 어마 무시무시한 내용이다! 더 글로리를 재밌게 봤지만, 김은숙 작가의 작품을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는 이유는 모든 인간은 선한 부분과 악한 부분을 동시에 갖고 있는데, 김은숙 작가의 작품에는 선한 인간은 극단적으로 선하기만 하고, 악한 인간은 밑도 끝도 없이 나쁘기만 해서다. 연진이도 그렇고, 동은이 엄마도 그렇고. 가해자, 피해자, 착한 놈, 나쁜 놈으로 무 자르듯 갈라놓은 캐릭터 설정은 내겐 크게 현실성이 없게 느껴진다.
이와 반대로 강풀의 무빙은 빌런에게도 시청자 입장에서 볼 때 나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서사를 부여한다. 드라마 막판에 북한에서 온 기력자들(초능력자들)이 남한 기력자인 류승룡, 한효주 기타 등등과 크게 한 판 붙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짧지만 간단하게 북한 기력자들의 숨겨진 이야기가 격투 신 도중에 종종 등장한다. 특히, 남북 관계 이야기가 들어가는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는 북한을 나쁜 짓만 골라서 하는 적으로 묘사하기 마련인데, 강풀은 나쁜 짓을 하는 것은 북한의 우두머리들이고, 그들의 명령을 받아 움직일 수밖에 없는 아랫사람들의 뒷이야기를 잘 풀어내 빌런을 한없이 나쁜 놈으로 만들지 않는다. (내 친구 한 명은 드라마 막판에 갑자기 강풀식 해피앤딩으로 급 마무리돼서 조금 별로였다고 했다. 공감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장면은 희주가 피가 철철 흐르는 북한 기력자 용덕이를 위로해 주는 부분이다. 사실은 희주 아빠인 구룡포한테 얻어터져서 피투성이가 된 건데, 그 사정을 모르는 희주는 피범벅이 된 키 큰 아저씨가 걱정돼 까치발을 해서 포옹을 하며 위로해 준다.
처음에 누군가 무빙을 줄거리를 설명해 줬을 때 "조인성이 하늘을 난다"라는 이야기만 듣고 앞뒤가 안 맞는 개떡 같은 소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한국 드라마의 클리세를 떠나 일상을 살아가는 초능력자들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낸 무빙을 보면서 '하늘을 나는 조인성'이 설득력 있는 스토리로 다가왔다. 따뜻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잔인한 액션 신이 많아서 그럴 땐 실눈을 뜨고 귀를 막은 채 감상했다.
물론 무빙에도 몇 가지 단점이 있다. 분명 미국인이라고 했는데 미국인인 같지 않는 영어를 구사하는 프랭크 (류승범)가 그 예다.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고 어려운 이야기는 다 고급 한국어로 올바른 문법을 쓰며 대사를 치는 프랭크의 모습은 초반에 극에 집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지만, 이러한 단점은 드라마 전체 흐름을 해치지는 않는다. 그리고 캐릭터가 너무 많다 보니 스토리가 늘어지고 조금 산만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올해 본 드라마 중 무빙이 단연 최고라고 생각한다!
나는 조인성의 영원한 팬이지만 그래도 무빙에서 가장 좋았던 캐릭터는 구룡포, 류승룡이다. 나는 류승룡이 넷플릭스 '킹덤'에서 나쁜 놈 영의정 조학주를 연기하며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류승룡은 구룡포를 연기하며 연기 포텐이 또 터진 것 같다. 강철무쇠 몸이지만 마음은 순두부처럼 여린 구룡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배우가 한국에 몇이나 있을까. 류승룡과 커플로 등장한 곽선영의 연기도 참 좋았다. 슈퍼히어로의 삶을 그려낸 게 아니라 초능력이 있지만 이를 숨기고 우리와 함께 섞여서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그들의 모습이 담아서 더 신선했다고 해야 하나. 특히, 많은 사람들이 극찬한 곽선영의 장례식 장면에서 류승룡이 오열하며 무너지는 모습은 아직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정도로 크게 감동을 받았다. 갑작스레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너무 슬프지만 그래도 무너진 자신을 일으킨 뒤 딸을 챙기러 가는 아빠의 모습도 현실적이었다. 초능력이 있든 말든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는 평범한 우리들처럼 한없이 무너지고, 또 아빠이기 때문에 다시 힘을 내는 그 모습. 우리 일상에서 수없이 봐왔던 장면들이다.
결론은 무빙은 잘 만들어진 드라마라는 것. 디즈니플러스 구독료를 내고서라도 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아마 넷플릭스에 떴다면 더 반향을 일으켰을지 모른다. 친한 친구가 "만약 초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떤 능력을 갖고 싶냐"라고 물어봤다. 나는 투명인간이 돼서 세계 정상회담 같은 곳에 몰래 들어간 뒤에 중요한 이야기를 엿듣고 국가 사이에 정보 장사를 할 것이라는 빅픽처를 공유했다. 그러자 내 친구는 자기는 "학습 능력"을 갖고 싶다고 했다. 앗, 똑똑한 친구 같으니라고. 그래서 나도 투명인간 포기하고 초인간적인 학습 능력을 갖고 싶다고 마음을 바꿨다. 그리고 그 학습 능력으로 논문을 하루 이틀 만에 뚝 딱 써낸 뒤 좀 논 다음에 2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는 거다. 햐.. 논문 쓸 생각을 하면 또 마음이 무거워진다. 책이라도 한 자 더 읽어야지. 그럼 여러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