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홍콩
라소닉 에어컨이 우리 가족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은 올해 봄부터였다. 홍콩 날씨가 더워지면서 안방 에어컨을 틀었는데 안방에 설치한 에어컨 두 개 다 뜨거운 바람이 나오며 작동되지 않는 것이었다. 공부방에 있는 에어컨은 수동으로 작동이 됐지만 에어컨 건전지를 교체해도 먹통이었다. 우리 집에 있는 벽걸이 에어컨 네 개 중 거실에 있는 10년 넘은 파나소닉 에어컨만 멀쩡히 작동하고, 세 놈이 모두 먹통이었다. 에어컨 세 개의 공통점이 있었다. 지난해 아파트 리모델링을 하면서 새로 단, 산 지 1년도 안된 새 에어컨이라는 것, 그리고 중국 브랜드 라소닉 에어컨이라는 것이다.
사실 라소닉이라는 브랜드는 살다 살다 처음 들어봤다. 처음에는 파나소닉인데 잘못 발음해서 라소닉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난생처음 들어본 중국 가전제품 브랜드가 우리 가족을 분노와 고통 속으로 몰고 갈진 올해 봄엔 미처 알지 못했다. 봄에는 더울 때 거실 에어컨을 틀어놓고 참고 살다가 여름에 집에 친구들이 놀러 와 며칠 지내다 가면서 문제가 생겼다. 안방 문을 열어야 거실 에어컨이 안방까지 겨우 도달하는데, 친구들이 옆방에 자고 있으니 문을 활짝 열고 자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귀차니즘으로 미루던 에어컨 수리를 A/S 센터를 통해 (남편이) 접수했고, 그때부터 라소닉의 저주가 시작됐다..
새로 단 에어컨 세 개가 동시에 오작동하는 것은 제품 품질 점검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왜 듣지도 보지도 못한 라소닉이라는 에어컨을 사게 됐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 남편에게 물었다. 아파트 리모델링을 코로나 시기에 하다 보니 그때 홍콩에 남아있는 벽걸이 에어컨이 라소닉 외에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인테리어 업체 사장님의 말을 듣고 듣보잡 에어컨 라소닉을 세 개나 설치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왜 라소닉만 코로나 시기에 홍콩에 남아있었는지 이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거짓말 안 하고 6월 달부터 진행된 에어컨 수리가 10월인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 그 과정은 이러했다. 라소닉에서 제품 점검 -> 인테리어 업체에서 벽 해체 -> 라소닉에서 결함 제품 교체 -> 인테리어 업체에서 벽 페인트칠 및 재수리의 무한 반복이었다. 나의 광동어는 거의 존재하지 않다시피 해서 라소닉, 인테리어 업체와 커뮤니케이션이 남편이 도맡아 했고, 나는 집에 남아 라소닉 업체 직원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다른 업체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라소닉 녀석들은 제품도 그지 같은 것을 팔면서 A/S 서비스도 꽝이었다. 날짜를 정하면 낮 12시-4시 사이에 오겠다는 식으로 4시간 정도 여유를 두고 약속을 잡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들이 올 때까지 집에서 꼬박 기다려야 하는 고객은 하루 반나절 시간을 버려야 한다. 내가 혼자 있을 때 집에 처음 방문한 라소닉 AS 직원은 보통화가 능통하고 광동어와 영어가 서툴어 나와 소통이 거의 되지 않았다. 그 직원이 회사에 있는 남편과 전화로 통화하는데도 광동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듣기에도 무례한 것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나에게 묻지도 않고 거실 의자를 마음대로 밟고 올라가 부엌 찬장을 여기저기 열고 무언가를 찾을 때는 우리 집인데 손님의 예의를 갖추지 않는 그의 행동을 멈출 수 없는 내 광동어 수준이 원망스러웠다. 이후에 남편에게 물어보니 그 AS 직원은 남편과 내가 동거인인 줄 몰랐고, 내가 홍콩 사람이 집주인(남편)인 아파트에 세 들어가는 외국인 세입자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세입자 집에서는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단 말인가? 이 일을 시부모님께 공유하자 시아버지는 자신은 시간이 많으니 앞으로 에어컨 수리 기사가 오면 소통하고 우리 집에 와서 기다리겠다고 하셨고, 그때부터 우리는 라소닉 업무를 시아버지께 위임하게 됐다.
그 이후 라소닉 에어컨 기사 추가 점검 한 차례, 문제의 에어컨 교체 한 차례, 총 두 차례를 추가 방문했고, 인테리어 업체도 두 번 따로 방문해 벽을 해체하고 원상 복구했다. 문제는 이렇게 말 많은 에어컨이 에어컨 기사 한 번의 방문으로 금방 고쳐질 일이 만무했다. 우리 집 안방에는 에어컨이 두 개 있는데, 한 에어컨에서는 계속 뜨거운 바람이 나오면서 에러 코드가 떴다. 망할 놈의 라소닉... 마음 같아서는 그냥 다 뜯어내고 삼성, LG, 최소한 파나소닉으로 새로 사고 싶었지만, 그래도 생돈 주고 산 새 에어컨을 갔다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아버님의 중재로 다시 라소닉 수리 기사가 네 번째 방문을 했고, 그들이 새로 교체한 에어컨에도 품질 문제가 있어 새 에어컨으로 재교체를 하기로 했다. 첫 번째 판매한 것도 불량, 두 번째 교체한 것도 불량인 것이다.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이미 벽 해체, 원상 복구 작업을 한 번 거친 벽을 또 인테리어 업체를 불러서 뜯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6월부터 10월까지 5개월 동안 이어지는 라소닉 에어컨 사태는 성격 좋은 우리 시아버지도 화나게 만들었다.
이 일을 겪으면서 라소닉은 우리 집 금지어가 됐다. 특히, 생일이나 경사가 있을 때 라소닉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꺼내지 않는다. 브랜드 고유명사가 이렇게 한 가족을 침울하게 할 수 있다니.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산 가전제품에 원래도 크게 없었던 신뢰가 완전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이 억울하고,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이 사건을 통해 배운 점이 두 개 있다. 첫째, 가전제품은 (특히 오래 쓸 백색가전) 웬만하면 중국산을 피할 것 (샤오미는 성능이 좋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번 사건 때문에 중국산 가전제품에 트라우마가 생겼다ㅜㅜ). 둘째, 광동어를 배울 것. 광동어 실력이 컴플레인을 할 만큼 늘려면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무슨 말인지 알아먹어야 내가 억울한 상황에 놓였을 때 나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것 같다. 라소닉 사태 이후로 온라인 과외 선생님을 구해 일주일에 한 번씩 광동어를 공부하고 있다. 속도는 아주 더디지만 그래도 조금씩 간단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돼서 너무 뿌듯하다.
100%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다는 말이 맞다. 100% 좋은 점이 없을 것 같은 이 라소닉 사태는 광동어를 배워야겠다는 나의 의지를 굳게 다지게 했고, 그 결과 과외 선생님을 찾고, 공부하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네이버에 '라소닉'을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것으로 봐 아직 삼성, LG가 장악한 한국 가전제품 시장에는 진출하지 못한 듯하다. 혹시나 지금 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저렴한 가격 때문에 라소닉 전자제품을 살 의향이 있는 분들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말리고 싶다. 제발, 라소닉의 저주를 피해가세요. 라소닉은 피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