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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Nov 30. 2023

가족 문화 차이

어쩌다 홍콩

홍콩에 와서 결혼한 뒤 적응하기 힘들었던 가족 문화는 매주 일요일마다 이어지는 시댁 가족의 점심 또는 저녁 식사 자리였다. 홍콩 가족은 한국인 기준으로 과하다고 여길 정도로 굉장히 자주 만난다. 매주 일요일 홍콩 로컬 식당에 가면 크고 동그란 식탁에 3대가 둘러앉아 딤섬을 먹는 광경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나는 시댁이 차로 10분 거리, 걸어서 40분 거리이기 때문에 왕래가 더 잦다. 홍콩 사람들은 부활절, 크리스마스 등 서양 명절은 물론 한국인이 잘 챙기지 않는 동지 같은 아시아 명절까지 다 챙기기 때문에 가족 모임이 더더욱 많다. 사실, 동지에도 시댁에 모여서 밥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지만, 이것이 홍콩 문화라고 하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한국과 가까운 중국 샨동 출신인 내 친구 A는 홍콩의 끈끈한 가족 문화가 광동 문화의 연장선이라고 했다. A 역시 결혼하기 전 광동 출신 전 남자친구와 오랜 기간 연애를 했는데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고 했다. 결혼까지 인연이 이어지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광동식 가족 문화 때문이었다는 것이 A의 설명이다. 광동 출신 남자들은 전통적 가족관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독립, 전문성을 중시하는 내 친구 A의 가족 가치관과 많이 부딪쳤다고 했다. A는 중국 내에서도 북부 지역 여성들의 경우 광동 출신 남성과 연애할 경우 이러한 가족 문화 때문에 갈등이 종종 발생한다고 했다. 물론 홍콩은 영국 식민지 경험 탓인지 서구권 문화가 결합돼 있어 양성평등 의식이나 사회나 가족 내에서 여성의 지위는 한국보다도 높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끈끈한 가족 간의 유대는 여전히 광동 문화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는 듯했다. A의 설명을 들으니 한국인인 내가 왜 이러한 가족 문화 차이를 느끼게 되는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거리로만 보면 광동성에서 한국보다 샨둥성에서 한국이 훨씬 가깝다. 그래서 문화 차이도 더 많이 나나.. 대륙은 어마어마하구나!

나는 일요일마다 시댁과의 저녁 식사를 당연시 여기는 홍콩식 가족 문화에 도시 사이즈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국토 면적이 작은 한국도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로 이동하면 3시간이 걸리지만, 홍콩은 도시 끝에서 끝까지 빠르면 1시간 정도면 도착할 만큼 도시가 작다. "멀어서 못 간다"는 변명보다 "바빠서 못 간다"는 변명이 더 잘 통하는 이유다. 나는 한국에서도 10년 동안 얼굴 한 번 안 보고 산 친척과 사촌들이 많은데, 결혼한 지 1년이 안된 상황에서 시부모님 형제자매, 고모이모삼촌들을 모조리 만났다. 해외에 사는 고모님도 홍콩을 자주 찾아 내가 한국에 살 때 우리 고모를 만난 것보다 더 자주 만났다. 홍콩인들은 대부분 영어에 능통하지만 가족들끼리 만나서는 광동어로만 소통하기 때문에 친척 모임에 가면 나는 2-3시간 동안 혼자 딴생각을 한다. 그러한 시간들이 즐겁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홍콩인들이 중시하는 설날을 제외하고 빠져도 되는 친척들 모임은 되도록 안 가기로 남편과 결정했다. 그리고 고모이모삼촌 모임에 갈 때마다 남편의 사촌들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고, 꼭 나와 남편만 그 자리를 지킨다는 점이 나를 더 억울하게 했다. 광동어도 못 알아듣는 외국인인 나도 맛있는 음식 먹는다는 생각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홍콩인 사촌들은 대체 어디에 간 것인가! 너네들은 왜 안 오는 것인가! 이런 모임에 갈 때마다 꼭 따라오는 질문이 있다 (이 질문은 이제 광동어로 말해도 이해한다). 너네 며느리는 이제 광동어 잘하니? 그런 질문을 수시로 하시는 친척 분에게는 미국 정부에서 분류한 언어별 난이도 랭킹을 참고하라고 조심스레 말씀드리고 싶다. https://www.state.gov/foreign-language-training/ 광동어는 한국어와 함께 나란히 카테고리 4 (최고 난도) Category IV Languages 언어에 속해 있다. 물론,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 기준이긴 하지만 한자를 잘 모르는 나에게는 성조가 무려 9개나 되는 광동어가 성조가 4개인 보통화보다 훨씬 더 어렵게 느껴진다. 친척 여러분도 한국어 한 번 공부해 보세요..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실 거예요.


한국인끼리 결혼해도 서로 다른 가족 문화 차이로 갈등을 겪지만, 선을 지키는 한국인의 가족 문화와 그 선이 아주 애매모호한 홍콩 가족 문화는 더 큰 갈등으로 번질 수 있음을 1년간의 결혼 생활을 통해서 알게 됐다. 개인 시간을 중시하는 자식 세대와 결혼한 자녀 세대와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을 당연시 생각하는 부모 세대, 게다가 거기에 이 모든 것이 어리둥절한 한국인 며느리가 껴있으면 갈등으로 번질 여지가 충분하다. 이러한 홍콩식 가족 문화에도 젠더 불평등이 있다. 홍콩인 여성과 결혼한 남편의 영국인 (백인) 친구는 아내의 홍콩 식구와 일요일 점심, 저녁 식사를 매주 하지 않는다. 서양인이라서 봐주는 것인지, 아니면 사위여서 봐주는 것인지, 그는 왜인지 매주 일요일마다 가족들끼리 자유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괜히 억울하다!


건강한 가족 모임은 모두가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즐길 때 비로소 확립된다. 한쪽이 억지로 어쩔 수 없이 의무감에 가족 모임에 참석한다면 전통과 문화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가족 모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도 숨 쉴 만한 구멍이 있다면 그것은 가족 내 위계 질서가 한국보다 약하다는 것이다. 시부모님은 우리 부부를 수시로 모임에 초대하지만, 우리가 일이 있어서 못 간다고 여러 번 거절해도 크게 개의치 않으신다. 처음에는 거절하는 것이 어려웠으나 이제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거절도 하는 연습을 해야 자연스럽게 하는 법! 나는 앞으로 모두가 즐기는 건강한 가족 모임을 하기 위해서 거절하는 법을 꾸준히 연습하려 한다. 가족들을 실망하지 않기 위해 원치 않은 모임에도 억지로 참석했던 어리둥절한 외국인 며느리는 이제 홍콩에서 1년 살면서 새로운 아이덴티티로 재탄생했다. 합리적으로, 서로의 참석이 꼭 필요하고, 즐길 수 있는 가족 모임에는 적극적으로 참석하되,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친척 모임은 거절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물론 일요일 가족 저녁 식사는 꾸준히 이어지겠지만... 이 세상 모든 며느리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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