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홍콩
지난해 8월 말 박사과정을 시작했으니 이제 꼭 1년 하고 두 달이 지났다. 지난 1년간의 과정을 되돌아보면 수업 다섯 개 듣고 에세이 쓰고, 박사자격시험 준비 하느라 정작 내 연구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 여름 방학에는 수업이 없으니 흥청망청 놀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나 8월 말로 앞당겨진 박사자격시험을 준비하느라 도서관에 매일 출근해야 했고, 박사자격시험을 치고 나니 2년 차 박사생이 돼버린 기가 막힌 현실이었다. 내 속도대로 공부하자고 다짐했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가끔 조바심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1학기 통계 수업을 듣긴 하였으나 그건 그때일 뿐, 나는 통계를 활용하는 양적 연구에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앞으로 극복해야 할 부분이다). 숫자 기반의 양적 연구를 하는 박사생 친구들은 논문을 투고하고, 출판하는 속도가 질적 연구를 하는 학생들보다 빠른 편이다. 통계왕인 같은 학년 친구 한 명은 여름방학 전 저널에 투고해 합격(?) 이메일을 받고 논문을 1차 수정 중이다. 나는 두 달을 탈탈 쏟아부은 끝에야 논문 주제가 정해졌는데, 몇몇 친구들은 저만치 앞서가는 느낌이다.
30대 후반 박사생의 장점을 굳이 찾아보자면 직장 경험 또는 자기 전문 분야에서 착안한 실용적인 연구 주제를 발견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나의 경우 박사 과정을 시작하기 직전에 유엔에서 난민을 보호하는 기구에서 일을 했는데 그때 난민 관련 정책을 공부하고, 난민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었던 경험이 박사 논문 주제를 새로 잡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올여름에는 지도 교수님이 바뀌는 것을 계기로 박사 1년 차 때 잡았던 정부의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주제를 뒤엎고, 난민 수용 정책을 연구하는 것으로 방향을 180도 틀었다. 내가 박사를 시작한 뒤 내린 결정 중에 가장 잘한 결정 같다. 학문적으로도, 세상에도 코딱지만큼 도움이 되는 연구 주제를 잡았다는 안도감,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남은 3년을 즐기면서 연구할 수 있는 주제를 잡았다는 즐거움 덕분이다. 새 논문 주제를 잡은 뒤 관련 책과 논문을 읽는 게 예전만큼 괴롭지 않고 즐거운 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박사 1년 차부터 똑같은 논문 주제를 고수한 친구들보다 논문을 진행하는 속도는 훨씬 느리지만 그래도 교수님이 추천하는 주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주제를 스스로 잡았다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박사 1년 차와 박사 2년 차의 가장 큰 차이는 학교 가는 빈도에 있다. 박사 2년 차가 되면서 학교에 가는 횟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티칭 어시스턴트 업무 때문에 학부생 수업에 들어가야 할 땐 (교수님 요청이 있을 경우) 가긴 하지만, 마음먹고 학교에 가지 않으면 한 달 내내 가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학과 소식통 친구들이 '이 교수님이 어쨌대', '저 학생은 어떻대' 이런 이야기를 시시콜콜 전해주기 때문에 가십을 통해 그들과 친분도 쌓고, 우리 집 고양이가 아닌 인간들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은 학교 연구실로 출근해 공부하는 편이다. 가십도 가십이지만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연구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 또한 공부의 연장이라 생각한다^^
나는 박사 공부 최종 목표는 독립 연구자가 되는 것이라고 한 교수님의 말에 동의한다. 1학기때 수업을 한 교수님도 말했지만, 일부 박사생들 중에서 졸업을 한 뒤 주니어 교수가 된 뒤에도 지도 교수에게 의존하며 독립적이지 않는 연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교수님은 "어떤 학교든 모든 박사 과정의 목표는 독립적인 연구자를 양성하는 것"이라며 앞으로 4년간의 박사 공부를 통해 우리 모두가 독립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길 바란다고 했다. 옮은 말씀이지만 혼자서 내 연구의 방향을 잡고 실행할 생각을 하면 여전히 두렵다..
8월 말에 예전 지도 교수님이 떠나고 새 교수님 밑에서 논문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새 교수님의 훌륭한 인품과 실력은 1-2학기 수업을 들으며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의 지도를 받아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괜찮았다. 박사자격시험을 공부하고 있는 여름 방학 때 'if possible'이라는 문장이 담긴 정중한 이메일로 내년 초 미국에서 열리는 정치 과학 쪽 컨퍼런스가 여러 개 있으니 일단 초록을 제출해 보라고 정보를 공유해 주셨다. 시험 공부하기도 벅찬데 컨퍼런스 초록을 또 따로 준비하라니... 일단 해보겠노라고 긍정적인 이메일을 보냈지만 여러모로 정신이 없었다. 직장생활을 11년 하면서 생긴 내공이 있다면 '못하겠다'는 말보다는 '일단 한 번 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이 먼저 나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없는 시간을 쪼개 '일단 한 번' 해봤더니 초록이 두 개 완성됐다. 세 개 컨퍼런스에 지원했는데 하나는 진작에 떨어졌고, 내년 초 미국에서 열리는 컨퍼런스 하나는 기대도 안 했는데 의외로 붙었고, 나머지 하나는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역시, '일단 한 번 해봐야' 결과를 알 수 있는 법이다.
교수님께 이 결과를 알려드렸더니 교수님은 컨퍼런스에 참가하는 것이 'great winter plan'이 될 것이라며 지금 하는 논문 프로포절을 빨리 끝내야 된다고 하셨다. 그러자 나는 또 '그렇다면 논문 프로포절을 서둘러 아무리 늦어도 이번주까지는 제출하겠다'며 스스로 마감 기한을 정해 일단 교수님께 던져보았다. 던진 말이 있으니 교수님을 기다리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서든 이번주까지 끝내야 한다. 이렇게 정중하게 나를 채찍질해 주는 교수님이 있어서 감사하다. 독립적인 연구자가 되려면 이런 외부 채찍 없이도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독립성이 부족한 모양이다. 그래도 '일단 한 번' 해보는 자세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내 연구 주제가 온전한 모습을 갖추려면 여전히 멀었지만 여기까지 여러 과정을 도장을 깨듯이 하나하나 해낸 나를 격려해주고 싶다. 이번주 논문 프로포절을 내면 하루 신나게 놀아야지. 직장인 연차 냈다고 생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