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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May 10. 2024

최근 인생 업데이트

<어쩌다 홍콩>

지난 두 달간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에너지가 바닥나는 경험을 했다. 글로만 배운 임신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드라마에서는 여자 주인공들이 갑자기 우웩! 하고 화장실로 뛰어가 토를 하면서 임신을 알아차리지만, 현실 임신에서는 토 대신 글로 형용할 수 없는 수많은 증상들이 나타났다. 임신 6주 차쯤에는 코로나 걸렸을 때보다 더 아픈 몸살이 찾아와 침대에 이틀 넘게 누워있었고, 밥맛은 떨어지고, 매일 하던 운동은커녕 집 밖을 나설 힘도 없어서 침대와 몸이 하나가 된 생활을 몇 주간 이어갔다. "밖에 나가서 산책해"라는 남편의 걱정 어린 말이 잔소리로 들리고 짜증 날 만큼 호르몬은 요동쳤다. 머리는 돌아가질 않으니 공부에는 진전이 없고, 그 와중에 미국에 2주간 학회 참석 및 여행 계획까지 잡혀있어서 최악의 컨디션으로 최장시간 비행을 하는 여행도 해야 했다. 한국의 성교육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아무도 디테일하게 임신을 하면 내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임신은 이토록 힘든 일이었구나! 내 몸의 에너지가 두 달 동안 바닥 치는 것을 경험하면서 이 모든 것을 담담하게 겪어낸 임신 출산 선배들이 너무 존경스러워졌다.


임신 12주가 지나자 체력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오랜 침대 생활로 팔뚝살은 늘어나고, 온몸에 근육이 다 빠진 느낌이지만 11주 차에는 산책을 하고, 가벼운 요가를 할 에너지는 회복됐고, 12주부터는 가벼운 러닝과 땀이 나는 요가를 병행했다. 몸이 살만해지자 정신도 조금 맑아졌다. 가족들과 주변 가까운 친구들에게 임신 소식을 알렸고, 휴학 절차를 밟기 위해 지도 교수님을 직접 뵙고 임신 소식을 전했다. 지도교수님은 나의 임신을 진심으로 기뻐해주셨고, "공부는 1년간 완전히 손에서 놓고 휴학하고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라"라고 응원해 주셔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휴학 신청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바로 알아봐 주셨다. 정말 일처리가 빠른 사람이다.


출산 자본주의의 끝판 대장, 홍콩


홍콩은 한국과 달리 사립 병원, 공립 병원 두 가지 시스템으로 나뉜다. 사립 병원의 장점은 오래 기다리지 않고 스페셜리스트(전문의)를 볼 수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사악한 비용이다. 나는 35세 이상 나이가 많은 임산부이기 때문에 임신 초기에는 2주에 한 번씩 사립 병원에 가서 초음파 검사를 봤고 (공립병원에서 초음파 진료를 보려면 최소 임신 12주는 넘어야 한다..), 그때마다 2000불 (한국돈으로 35만 원 정도)이 청구됐다. 공립 병원 진료는 거의 공짜여서 비용 부담은 없으나, 첫 진료는 의사가 아닌 산파 (midwife)와 한다. 내가 임신 12주 차 때 공립 병원에 처음 갔을 때도 의사를 만나지 못했고, 산파와 간단한 상담을 했다. 2주 뒤로 잡힌 진료에서 의사와 첫 진료가 이뤄진다고 하니, 홍콩 공립 병원에서 산부인과 의사를 만나려면 최소 임신 14주-15주는 돼야 한다.


임신 중기가 되면 이제 출산을 어디서 할지 정해야 하는데 사립 병원에서의 출산 비용을 들으면 정말 억 소리가 난다. 처음에 0이 하나 더 붙은 줄 알았다. 홍콩섬에서 비싸기로 소문난 사립 산부인과는 피크에 위치한 마틸다, 코즈웨이베이에 있는 사니타리움이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비싼 사립 병원에서 출산을 하면 은근히 자랑하기도 한다. 처음엔 여기에 어떤 사회적 의미가 있는지 몰랐으나 '우리는 이렇게 비싼 사립병원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경제력이 있다'는 것을 넌지시 주변에 알리는 것이다^^) 건너서 들은 출산 비용은 한국돈으로 기본 2천만 원, 입원 기간이 길어지거나 다른 치료까지 더해지면 2주 입원에 5천만 원 넘게 올라간다고 한다. 한국의 유명 대학병원 VIP룸 하루 병실료가 100만 원대인데, 홍콩의 사립병원 진료 및 입원료는 비싸도 너무너무 비싸다. 억 소리 나는 사립 병원의 출산 비용에 비하면 공립 병원에서 출산은 하루 병실료만 내면 되는 수준으로 거의 공짜라고 보면 된다. 다만, 공립 병원에서는 필요한 의료적 치료만 제공하기 때문에 의료적 이유가 아니라 산모의 의지로 제왕절개 출산을 하고 싶다면 사립 병원으로 가야 한다 ^.^


빅토리아 피크에 미니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보이는 이 병원은 출산 비용이 비싸기로 소문나 있다.
홍콩섬에 있는 공립 병원인 짠육 병원. 이곳에서는 출산 전 임산부 체크업 진료가 이뤄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비싼 사립병원들이 중증 환자나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공립 병원으로 보낸다. 사립병원은 비싼 비용에 걸맞게 환자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공립 병원의 의료진, 의료 서비스 시설이 사립병원보다 더 우수하다. 예를 들어, 조산 위험이 있거나 아기가 태어나 인큐베이터에서 지내야 할 우려가 있다면 사립병원에서도 산모를 공립 병원으로 전원시킨다. 홍콩섬의 공립 병원 퀸 메리 병원에는 사립 병원에는 없는 신생아 중환자실 (NICU)가 있어 소아 중환자 치료가 가능하다. 공립 병원 중심의 홍콩 의료 서비스는 영국의 영향이 큰 듯하다. 영국의 공공의료 시스템인 NHS가 영국을 지탱하듯이, 영국 식민지의 영향으로 홍콩도 공공 의료 중심의 양질의 의료 서비스가 발달한 것이다. 나는 앞으로 사립병원 진료 빈도를 줄이고, 공립 병원에서 출산을 하려고 준비 중이다. 작고 소중한 월급을 버는 박사생이 출산에 수천만 원을 쓸 수 없다!!! 공립 병원 예약 진료는 내가 가고 싶은 병원을 아무 데나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주소지를 기반으로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자동 배치된다. 그래서 공립 병원 첫 진료를 받을 때는 주소지 증명 서류를 반드시 가지고 가야 한다.


한국의 산후 조리원이 그립다


출산 병원을 정하면 다음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이 산후조리다. 홍콩에는 한국과 같은 산후조리원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Pui Yuet이라고 불리는 산후도우미를 직접 고용해야 한다. 요즘 서울에 있는 산후조리원은 2주 머무르는데 400-500만 원 정도라고 건너 들었는데, 홍콩의 산후도우미 비용도 만만치 않다. 산후도우미 경력에 따라 비용이 상이하지만, 내가 알아본 결과 시장 가격이 보통 3만~3만 2천 홍콩 달러 (520만 원~560만 원 정도)로 책정돼 있다. 하루 8시간 근무, 일요일 근무 제외에 총 26일을 일하는 조건이다. 종일 근무나 일요일 근무까지 원할 경우 금액은 쭉쭉 올라간다ㅠㅠ


지난주에 건너 건너 소개로 알게 된 홍콩 출신 산후 조리사와 비디오 면접을 봤다. 지금까지 20명 넘는 아기를 돌본 경험이 없는 40대 홍콩 아주머니로, 산후조리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듯했다. 이 분을 소개해주신 한국 엄마가 이 분의 홍콩 음식 솜씨가 엄청나다고 했는데, 음식 사진을 받아보니 정말 보통이 아니었다. 같이 음식 사진을 보던 남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음식 사진 외에도 홍콩 정부에서 승인한 산후조리사 자격증, 예전 고객들의 추천서 등을 공유해 주셔서 일주일간 생각을 해보고 계약을 할 예정이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내 집에 한 달 내내 출근한다고 생각하니 꼭 손님이 내 집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할까 봐 걱정이다.


그래도 요가는 포기 못해…

++

이제 임신 중기가 되면서 살만해지자 공부 고민이 다시 시작했다. 사실 4월 초 학회를 다녀온 뒤로 공부를 손에서 놓다시피 했다. 연구에 두 달간 거의 진전이 없고, 논문에 글 한 자 보태지 않았다. 2년 차 직장인이 겪는 퇴사 고민과 비슷할까.. 박사 공부에 대한 열정이 사라졌고, 이렇게 2년 더 공부해서 박사 학위를 따면 뭐 하나 하는 현실적인 고민이 시작됐다. 회사를 다니고 있다면 매일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꾸역꾸역 일을 해내겠지만, 박사 공부는 내가 나태해지면 한없이 공부가 밀리게 된다는 단점이 있다. 최근 필라테스 학원에서 만난 출산이 임박한 만삭 임산부는 "임신 중기는 우리의 컨디션이 가장 좋은 프라임 타임"이라며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이때 바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래, 나는 지금 나는 내 임신 인생의 전성기다! 이 전성기는 딱 석 달간 지속될 테니, 배가 불러오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차근차근 해내겠노라고, 브런치에 기록을 남긴다. 이렇게 적어놓으면 뭐라도 하겠지... 공부하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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