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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옛날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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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Apr 11. 2019

10대의 나에게

<뒤늦은 반성문>

고등학교 1학년 때였나 보다. 담임 선생님이 조용히 나를 따로 불렀다. 학교에서 크게 말썽 피운 적이 없었는데 선생님이 왜 나를 따로 보자고 하시는 건지 궁금했다. 용건은 간단했다. 육성회비를 면제해주고 싶다는 거였다. 아빠 혼자서 두 딸을 키우기 힘들 테니 육성회비 면제해주겠다, 아빠한테 말씀드려라, 뭐 이런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존심 상하지 않게 학생을 따로 불러서 챙겨준 그 선생님의 마음에 감동해 감사하다며 선의를 덥석 받았을 테지만 10대의 나는 예민했고 쓸데없이 자존심이 셌다. "괜찮아요. 쌤. 저희 아빠 육성회비 내실 거예요"라며 고맙다는 말도 없이 선생님의 호의를 단칼에 잘라냈다. 그때 당황해하시던 선생님의 마른 얼굴이 아직도 생각난다. 나는 왜 그랬을까. 그건 분명히 담임으로서 배려였을텐데 말이다. 다른 친구들이 아는 것도 싫었고, 엄마가 안 계신다고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그때의 나는 참 철이 없었다.


그에 반해 동생은 담임 선생님의 배려를 내치지 않고 이것저것 잘 받아왔다. 한부모 가정에 인터넷 할인 혜택을 준다는 정보까지 챙겨준 것을 보면 동생의 담임 선생님은 정말 세심하고 정이 많은 스승이었다. 나였으면 또 선생님의 배려를 '차별'이라고 생각하며 발로 걷어찼을 텐데, 동생은 나와 성격이 정 반대였다. 그리고 집에 와서 자랑했다.


10대의 나는 온몸에 힘을 주고 살았다. 기죽기 싫어서, 차별받기 싫어서. 어디 가서 엄마 없는 티가 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누가 묻지 않으면 엄마가 안 계신다는 이야기도 잘하지 않았다. 성인이 되고, 대학생이 되어서야 이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때 "엄마 없는 사람 손 들어보라"고 했던 선생님의 가정환경 조사는 오랫동안 상처로 내 마음에 박혀 있었다.  공부도 열심히 했고, 고3 때는 반장도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학교에서는 당당하게 지내는 척했지만 언제나 마음 한 구석이 외로웠던 것 같다. 어디다가 징징거릴 수도 없었고,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웬만하면 혼자서 다 해결하고 마는 독립성도 이때부터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했나 보다. 그래서 의존했던 것은 크리스천 방송 라디오였다. 라디오를 들으며 약한 내 마음을 스스로 위로했고, 수시로 사연을 보내 화장품부터 CD까지 온갖 상품을 받았다ㅋㅋ 그때부터 글쓰기에 재미를 붙였던 것 같다.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 작가가 쓴 '당신이 옳다'라는 책을 읽으며 10대의 나를 떠올렸다. 기죽기 싫어서 센 척하며 살았던 가엽고, 어린 내가 떠올랐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래서 성인이 돼 직장 생활을 하며 만났던 사람들 중에 내 마음을 보듬어주는 어른들을 만날 때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기울었다. 영국에서 석사 공부를 할 때 모두가 "열심히 하라"고 했지만 어떤 분은 "공부가 체질에 안 맞으면 대충하고 오너라. 열심히 안 해도 된다"고 말했고, 그 말이 그렇게 큰 위로가 됐다. 온몸에 억지로 주고 있었던 힘이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힘들 때 기대라는 사람들의 위로, 한국에서 영국 브리스톨까지 일부러 찾아와 맛있는 음식을 사주며 "넌 뭘 해도 잘할 거야"라며 격려해준 사람들의 위로, 성인이 돼서야 이것이 동정이 아니라 위로고, 배려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어릴 땐 왜 그걸 몰랐을까. 그때 그 시절, 10대의 나를 만난다면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일부러 센 척하지 않아도 된다고, 마음이 힘들 땐 힘들다고 말해도 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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