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내 나이 서른둘. 한국 나이로 서른셋. 지금껏 여러 남자들을 만났지만 가장 맘 편하게 했던 연애는 20대 초반에 친구로 만나 이십 대 중반에 연애를 시작해 3년간 만났던 남자였다. 3년은 긴 시간이었다. 우리는 그 기간 동안 사회인으로 조금씩 성장하는 우리 모습을 서로 관찰했고, 응원했다. 그는 까칠하고, 못됐고, 감정적인 내 성격의 흠을 무던히 받아준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 분에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땐 더 철이 없어서 그런지 억지도 참 많이 부렸고, 못된 말도 많이 했다. 그럴 때면 그는 잠깐 속상해하다가 "허허"하고 웃어넘겼다. 크고 작은 싸움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의 양보로 잘 넘어갔던 것 같다.
이렇게 잘 해주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마음속으로 나쁜 마음을 먹고 있었다. 나에게 모든 걸 다 맞춰주는 남자가 조금 지루했다. 연애가 다이내믹하지 않았고, 밥 먹고 차 마시고 영화나 보는 그 단조로운 일상이 지겨웠다. 잔잔하게 이어지는 그 평범한 연애와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때는 어려서,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우리 관계를 진통 없이 유지하기 위해 항상 참고 견뎠는지도 모르겠다. 3년간 무탈하게 이어진 관계는 8할이 그의 양보 덕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그땐 그게 고마운지 몰랐다.
이런 일도 있었다. 아는 선배의 결혼이 때마침 경주 벚꽃 축제 시기와 맞물려 관광객이 미어터지는 경주 보문단지에서 열린 적이 있었다. 나와 그는 결혼식이 마치는 시간 무렵 경주휴게소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하지만 결혼식이 끝난 뒤 보문단지 일대 교통이 마비되는 바람에 경주휴게소에서 그는 4시간 넘게 차 안에서 야구를 보며 기다려야 했다. 너무 미안했다. 만나자마자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이자, 한숨을 쉬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쩌겠노. 차 막힌 게 니 탓도 아니고." 지친 얼굴이었지만 내 탓을 하지 않았다. 나였으면 어떻게 했을까. 그처럼 침착하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진짜 보살 같은 사람이었다.
이 남자는 내가 관계에서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을 때 슬퍼하는 그를 보며 힘이 되고 싶었다. 회사 퇴근하자마자 기차를 타고 장례식장에 갔고, 그곳에서 그와 그의 친구들, 가족, 친지들과 함께 밤을 새웠다.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슬픔이 가득한 남자의 눈을 봤다. 그래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의 아버지 사진 앞에 엎드려 나도 모르게 울어버렸다. 슬퍼하는 남친 때문에 운 건지, 고인을 넋을 위로하며 운 건지 모르겠다. 주책이다. 그리고 부조로 20만 원을 봉투에 넣었다. 빠듯한 내 월급 사정을 아는 그는 그것조차 고마워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마음을 추스른 뒤 차를 몰고 내 집 앞에 온 남자는 내게 "고맙다"라고 했다. 진심이 느껴졌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항상 그의 양보와 마음을 받기만 했는데, 내가 힘이 됐다니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고맙다고 말해줘서 고마웠다.
솔직히 말하면, 오래전 끝난 이 연애 이후 그만큼 마음이 편한 연애를 다시 해보지 못했다. 내 성격이 못돼먹고 까다로운 탓인지 항상 별 것 아닌 일로 다퉜다가 관계를 정리했다. 서로가 너무 달라 헤어진 적도 있었고, 한쪽의 마음이 식어 헤어진 적도 있었고, 상대가 나를 너무 바꾸려고 해서 헤어진 적도 있었다.
난 연애를 할 때마다 사랑받고 싶었다. 사랑받는 기분이 좋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어릴 때 엄마의 부재로 받지 못한 사랑을 연애를 통해서 채우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연애는 남녀가 동등한 관계를 맺고 하는 것인데, 부모와 같은 사랑을 줄 수 없는 건데, 그와의 연애에서 우리 아빠가 나한테 베풀 법한 넉넉한 사랑을 체험해서 그런지 다음 연애를 할 때마다 잘못된 기대를 했고, 상처받았다. 연애가 무섭고, 결혼이 두렵다. 남한테 상처받을까 봐 무섭고, 내가 상처를 줄까 봐 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