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일기>
수 년 전 아주 좋은 사람을 만났었다. 선했고, 헌신적이었고, 배려심이 많았고, 내 주변 사람도 잘 챙겼다. 가족들, 친한 친구들과 학교 선배들은 나보다 그를 더 좋아했다. 회사 사람들도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부장님은 일찍 퇴근을 시켜주시면서 조의금으로 전달하라며 10만원을 주셨다. 부장이 좋은 사람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가 좋은 사람이어서 부장까지 챙겨주는건지 알 순 없지만 수 년이 지나도 그의 이름이 한 번씩 주변인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좋은 사람이었지만 우리는 인연이 아니었다. 서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로 결국 헤어졌고, 서로 마음을 정리하고 헤어지는데만 1년 넘게 걸린 것 같다. 애낳고 잘 산다는 이야기를 건너 건너들을 때면 사촌 오빠가 결혼해서 잘산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기분이 좋다. 질투할 줄 알았는데... 내가 철이 들었나, 아니면 그가 너무 좋은 사람이었나. 사랑받는게 어떤건지 알게해준 그가 행복하게 잘 살아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런 좋은 사랑이 있었는가하면 지금 생각해도 분통이 터지는 거지같은 남자들도 적잖다. 대학와서 처음 사귄 남자애는 저런 애를 왜 좋아했나 싶을 정도로 내가 수치스러워지는 놈이었다. 새내기 때 우리과 축제 주막에 와서 술 취해서 판을 엎은 적도 있고, 재수한다고 오랫동안 잠수탄 적도 있고, 내 친구들을 만나긴 커녕 지 친구들도 소개시켜주지 않은 은둔형 외톨이 같은 놈이었다. 근데 나 왜 좋아한거지....ㅠㅠ 좀 더 일찍 헤어지지 못해서 아쉬웠던 놈! 그래도 이런 거지같은 놈을 만나봤더니 남자 보는 눈이 생겨 그다음 연애를 잘 할 수 있었다.
긴 연애 공백 뒤 30대에 교제한 남자들도 좋은 남자라고 정의하기 어렵다. 미안하지만 그지같은 놈들이었다ㅠㅠ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의 기준은 배려다. 내 감정만큼 소중한 것이 상대의 감정이고, 내 생활 방식과 사고만큼 중요한 것이 상대의 생각과 삶이다. 그래서 배려는 교제의 기본이다. 30대에 첫 교제한 사람은 지나치게 보수적이어서 만날 때마다 숨통이 막힐 것 같았고, 결국 그러한 문제로 헤어졌다. 인류애가 강했던 마지막 남자도 자기 바로 옆에 있는 여친에게는 별로인 남자였다. 최근 읽은 글에서 헤어질 때 상대의 태도를 보면 인격이 보인다고 했는데, 상대방에게 마음 정리할 시간도 주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고 갑자기 떠나는 사람은 결국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연애에서 보여준 관계맺음은 아마도 다른 인간관계에서도 적용될 것이므로, 그는 모든 사람들과 관계 맺고 끊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았다. 참 다행인 것은 조금이라도 일찍 헤어졌다는 것이다. 더 상처받기 전에 나를 보호할 수 있어서, 더 나이를 먹기 전에 별로인 사람과 헤어져서 참 다행이었다.
나쁜 남자-좋은 남자-좋은 남자-그지같은 놈들의 사이클을 통해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나쁜 남자, 그지 같은 남자가 내게 나쁜 영향만 미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을 골고루 만나봤기 때문에 옥석을 가릴 수 있는 눈이 생겼다. 좋은 남자는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줬고, 그지같은 놈들을 통해선 "연애할 때 저렇겐 안해야지"라는 교훈을 얻었다. 나를 성장하게 해준 과거에 모든 남자들에게 감사한다. 좋은 경험이든 나쁜 경험이든, 모든 경험은 삶의 거름이 되는 거니까. 당신들 덕분에 지금도 나는 자라고 있다. 그래서 참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