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GH LOW
출퇴근 길에 팟캐스트 듣는다. 음악도 좋지만 어떤 날은 조곤조곤 차분히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목소리가 더 듣기 좋다. 나와 뜻이 맞는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있으면 마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기분이 든다. 요즘 가장 즐겨 듣는 것은 Emrata의 HIGH LOW다.
오늘 출퇴근길에 들은 에피소드는 에밀리의 모델 커리어 경험담이다. 나는 에밀리를 Blurred Lines 뮤직 비디오로 처음 접했다. 내가 고등학생쯤이었을까? 모자이크도 없이 상반신 노출을 하고 노래에 맞춰 리듬을 타고 춤을 추는 에밀리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노래는 전 세계적으로 빅 히트를 쳤으며,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어 한동안 어딜 가든 흘러나왔다. 에밀리가 그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에서 성희롱, 성추행 등의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10여 년이 지난 후, 몇 주 전 퇴근길이었다.
뉴욕 맨해튼의 고급 아파트에 살며 전 세계를 누비는 슈퍼모델 에밀리의 인생 경험담을 퇴근길에 간편히 들을 수 있다는 건 과연 현대 과학기술의 축복이다. 서울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초등교사인 나와 멋쟁이 에밀리 사이에 공통점이라곤 찾아보기 힘들 것 같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우리도 다 같은 사람이구나 웃음을 짓게 된다. 그가 느끼는 외로움, 분노, 고민, 희망, 꿈 모든 것들은 나의 그것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와의 공통분모를 찾아내는 일은 요즘 나에게 큰 낙이자 위로가 된다.
무슨 인과관계냐 싶을 수 있겠지만 에밀리의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나도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글을 쓰기로 했다. 내가 처한 현실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앞으로 나아갈 방향 등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들을 글로 써야겠다고. 에밀리는 팟캐스트 이름을 HIGHLOW로 지은 건 화려한 모델로서의 HIGH부터 한 인간으로서의 LOW까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라고 했다. 나도 나 자신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잘 살펴보면서 내 생각을 출력해야겠다. 그럼 인생이 더 재밌고 즐겁고 의미 있고 건강할 테니까. 비록 에밀리처럼 전 세계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는 않을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