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도서관에서 책 빌려 읽기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찰리 채플린-
24살 초임 때 만난 한 원어민 영어강사를 떠올린다. 그는 백인이었다. 기간제와 시간강사로 일하며 만났던 많은 원어민들 역시 대부분 캐나다, 영국, 미국 출신의 백인들이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남아공에서 왔다고 답했다. 부끄럽게도 백인인 네가 어떻게 아프리카 출신일 수 있느냐고 물어볼 뻔했다. 다행히 입을 잘 틀어막았다. 그와 이야기하며 남아공은 서구의 침략으로 식민지화되는 오랜 역사 속에서 다양한 인종, 문화, 종교, 언어가 발달한 다문화 국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나이 먹도록 그 정도 상식도 없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태어난 게 범죄>는 남아공에서 나고 자란 혼혈 코미디언 트레버의 자서전이다. 책 제목이 상투적인 표현 같지만 실제로 트레버는 혼혈이라는 존재 자체로 범죄가 되는 시대에 태어났다. 집 밖에서 트레버가 백인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면 아빠가 잡혀가고, 흑인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면 엄마가 잡혀간다.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그는 가볍고 위트 있는 문체로 덤덤하게 글을 쓴다. 그리고 ’아파르트헤이트'의 역사와 함께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말한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공에서 사람들을 와해하고 계급화하여 통치하기 위해 작동한 악명 높은 정책이자 법이자 체제다. 흡사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 시대 문화정치를 생각나게 한다.
나처럼 남아공의 인종 구성에 대해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는지 잘 몰랐던 사람, 평소 미국이나 유럽 등 백인 국가의 인종차별에만 주의를 기울여온 사람,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도대체 어떤 인종차별이 있었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또 평소 '백인과 흑인이 결혼해서 낳은 자식은 왜 흑인이 되는가?'와 같은 one drop rule에 의문을 품어봤거나, '흑인보다 동양인이 더 인종 차별을 받지 않는가'등의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있다면, 이 또한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 트레버의 마음이 참 맑고 예뻐서 지켜 주고 싶었다. 우리 반에도 트레버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에너지를 가졌지만 정말 순수하고 착한 친구들이 몇 명 있다. 쉴 새 없는 장난기로 선생님의 골머리를 썩게 하는데 이상하게 밉지는 않다. 분명 트레버의 주변 어른들도 트레버가 밉지 않았을 것이다.
또 책을 읽을수록 그렇게 맑고 순수한 트레버가 망가질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의 삶이 정말 비극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트레버 가족이 의부의 술주정과 폭력을 견디며 애벌레로 끼니를 연명할 땐 정말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트레버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비뚤어지지 않았다. 예쁜 마음씨를 잘 지켜냈다. 가난, 차별, 폭력, 범죄가 만연한 곳에서 잠시 흔들리더라도 결국은 나은 방향을 향해 갔다. 트레버는 그 힘을 웃음에서 얻었다. 분명 그의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슬픈데 결국은 웃기다. 책은 즐거운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할 뿐 분노와 혐오는 찾아볼 수 없다. 차별을 핑계로 변명하지 않으려는 그의 굳은 다짐이 느껴졌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는 토종 한국인은 살면서 자신의 뿌리와 역사를 고민할 일이 크게 없다. 전 세계를 돌아다닌 지금에야 이게 얼마나 큰 특권이었는지 깨닫는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도 자신의 근원과 정체성을 찾기 위해, 사회에 소속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숨 쉬듯 당연한 특권들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겸손해져야 한다.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은 트레버의 엄마 패트리샤다. 세상은 그를 최하층인 흑인 여성으로 규정하고 제한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어떻게 주체적으로 살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했고 실천했다. 흑인과 백인이 같이 식사조차 할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또 아프리카 작은 흑인 부족의 여성이었다. 그럴 수 있다고, 또 그래도 된다고 가르쳐 준 사람이 그 누구도 없었지만 패트리샤는 스스로 해냈다. 비록 그가 잘못된 선택을 내리는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의 삶은 아름다웠다.
패트리샤의 아름다운 고민과 번뇌, 도전정신, 끈기와 책임감을 나도 가슴에 새기기로 했다.
트레버와 패트리샤처럼
열린 마음으로 끊임없이 배우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겠다고 갈망하며,
또 지난 과거에 잠식되지 않고
항상 웃음과 함께하기를 다짐하며,
이 책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