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파과를 읽었다.
섬뜩한 이야기 속에서
복숭아 향이랑 귤 향이 맡아지는 듯했다.
예순이 넘은 킬러 조각은 이제는 퇴물 취급을 받으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책을 읽을수록 선명해지는 그의 대단했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대비되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할 무렵이면, 친절하게 책에서 과거 이야기를 꺼내어 조각에 대해 조금씩 더 알려준다.
파과의 문장은 내가 최근 읽었던 어떤 다른 책들보다도 무겁게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문장으로 묘사하는 주인공 조각의 삶은 정작 무채색 그 자체로 정말 무미건조해서 더욱 외로워 보였다. 그렇지만 사회의 최약자로서 차별받는 여성 노인이 킬러가 된다는 설정이 어쩐지 통쾌하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책 어딘가 조각이 냉장고에 붙은 썩은 복숭아 살점을 손톱으로 긁어내며 우는 장면이 있었다. 그런데 조각의 잘 나가던 시절 별명이 바로 손톱이다. 결국 파과인 썩은 복숭아도 조각 자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긁어내는 손톱도 조각 스스로를 암시했을 것이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인생을 도려내는 일을 업으로 한 조각의 삶 역시 온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름도 조각이었을까?
누구보다 비인간적이고 냉담했던 조각은 강박사를 만나면서부터 다소 인간적인 선택을 하나둘 내리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터 투우의 존재감도 커지기 시작한다. 투우가 조각에게 품은 감정은 단순한 복수심이라기엔 너무나도 복합적이고 어려운 마음이었다. 집착, 애정, 멸시 그리고 그 외의 다양한 것들이 한 번에 느껴지는 투우의 그림자들을 읽고 나면 설레야 하는지 두려워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투우의 마음은 어쩐지 애절하기까지 해서 무엇보다 맑은 사랑 같다고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책에서 전혀 묘사되지 않았던 투우와 아버지의 관계가 어땠는지 궁금해지곤 했다.
조각이 강박사에게 품은 감정은 과연 이성으로서의 사랑이었을까? 강박사를 만나기 전까지 조각의 본모습을 아는 사람은 동종업계 종사자뿐이었을 것이고, 조각은 그렇게 평생을 고립되어 살아왔을 것인데, 강박사가 자신의 본모습을 발견하고도 경멸하지 않은 채로 인간적으로 대해 주었을 때 비로소 조각은 자기 연민을 느낀 거였을을 지도 모르겠다. 과연 강박사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 길 없지만 말이다. 적어도 난 모르겠다.
또 궁금한 점들이 한 바가지다. 일이 끝나고 조각은 무용을 찾아갔을까? 조각은 왜 투우를 기억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을까? 정말 투우가 누군지 몰랐을까? 조각의 손에 끝장난 투우의 마지막은 과연 그가 바라던 대로였을까? 강박사의 딸은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아갈까? 류는 조각을 사랑했을까? 류의 아내는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다소 뜬금없지만.. 투우가 쓰던 향수 이름이 뭘까? 나는 이렇게 궁금한 생각이 쏟아지는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여운이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결말이 좋다. 그러나 파과는 읽고 난 후에 계속 곱씹게 되는 것이 어쩐지 싫지 않다.
파과의 외전으로 <파쇄>가 있다고 한다.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