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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양 Nov 24. 2023

술떡

지구촌시대의 타국살이


'오늘 아침은 술떡으로 해결하면 되겠다.'


이른 아침에 운동복을 갖춰 입고 카메라를 켜고 줌을 통해 영국 곳곳에 사는 운동친구들과 헥헥거리며 땀을 쭉 뺀 다음에 하는 일이 샤워와 아침준비다. 어떤 날은 운동 후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다가 금세 땀이 식어서 한기를 느껴 샤워도 하기 전에 다시금 솜이불처럼 두꺼운 우디(입는 이불 같은 후드티) 속으로 쏙 들어가기도 한다. 우디를 걸치고 준비하는 아이들 아침 메뉴는 주로 밥이나 빵이다. 여름에는 차가운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먹고 가기도 하지만 이렇게 썰렁한 계절이 오면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을 바탕으로 뜨끈한 아침을 준비하는 편이다. 아이들은 여름이건 겨울이건 상관없이 차가운 우유에 말은 시리얼을 먹어도 아무렇지 않지만 그걸 바라보는 내 팔다리에 닭살이 돋으며 부르르 떨게 되기에 시리얼은 여름 메뉴가 되었다. 


오늘 아침은 술떡이다. 영국에서는 구경도 못하는 귀하디 귀한 몸이다. 이 귀하신 분은 지난밤 한국에서 돌아온 H언니가 비행 전날에 떡집에서 판째로 산 것이다. 이 귀하신 분은 곧 러시아 전쟁으로 인해 현격하게 늘어난 열네 시간 반의 비행시간을 인고한 끝에 우리 집 냉장고에 안착했다. 쟁반처럼 커다란 크기의 하얀 술떡 위에는 검은깨가 시크하게 뿌려져 있고 네 귀퉁이에는 자주색 대추꽃이 피었다. 조심스럽게 일정한 크기의 작은 조각으로 잘라 지퍼백에 넣었다. 이제 이 술떡 조각들은 냉동실에 있다가 내 DNA에 인이 박힌 조국의 맛이 사무치게 그리운 어느 날에 아주 소중하게 행차하실 것이다. 전자레인지나 밥솥 안에서 포근함을 되찾은 후에 내 위장과 심장을 어루만져 줄 것이다. 조국의 맛이 그렇다. 내 피에 흐르고 있고  내 위장이 기억한다. 조국의 맛은 한국에서의 '기억의 맛'이다. 


H언니는 몇 달 전에도 한국에 다녀왔다. 갑자기 미망인이 된 언니는 5년 만에 한국에 갔다가 한 달 반 만에 돌아왔다. 오랜만의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올 때 언니가 보물처럼 모시고 온 것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중의 제일은 뭐니 뭐니 해도 바로 젓갈 5종세트였다. 낙지젓, 명란젓, 창란젓, 조개젓, 오징어젓. 언니는 한 달 반 동안 자식 같은 강아지 리플리를 돌보아준 나를 특별히 불러다 이 젓갈 5종세트를 영접시켜 준 것이다. 냉동상태로 수입된 것이 아닌 냉장상태의 신선한 젓갈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귀하신 몸인지라 한 젓갈 한 젓갈 하얀 밥 위에 젓갈들을 올릴 때마다 감탄의 숨을 들이마시고 경외의 숨을 내뱉었다. 다른 반찬 없이 그저 젓갈과 밥만으로 이루어진 이 밥상의 의미를 나는 너무나 잘 알기에 감동하고 감탄하고 감사했다. 오래 둘 수도 없고, 지금 먹어야 맛있는데 그 순간을 나와 공유하고 싶었던 언니. 그리고 그 가치를 백 프로 이해하는 나. 우리는 그렇게 밥그릇을 두 번 세 번 채워가면서 찰나와도 같은 행복을 공유했다. 




내가 처음 영국에 왔던 2006년과 비교해 보면 오늘의 영국은 아니, 더 정확하게 오늘날 영국 안의 한국 문화의 자리매김은 꿈인가 싶을 만큼 달라져 있다.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한인 커뮤니티가 있는 뉴몰든-우리는 이곳을 뉴몰동이라 부른다-에는 어느새 미국에서 진출한 한국슈퍼마켓 체인 H마트가 들어와 있다. H마트가 있긴 전에는 코리아 푸드라는 도매급 마켓이 유일했다. 손님들도 다양해졌다. 한국 교민들 외에도 타 아시아인들과 영국 현지인들도 많다. H마트가 들어오면서 더 다양한 한국식품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고 그럭저럭 아쉬운 대로 먹고살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늘 채워지지 않는 한 구석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기억의 맛이고 조국의 맛이다. 시장에서 까만 봉지에 담아주는 생물 고등어까지 거슬러가지는 않겠다. 그보다는 이마트나 홈플러스 생선코너에서 바로바로 손질해 주는 생선을 사는 것이 익숙한 세대다. 가자미에 알이 드는 철이 오면 서너 살 밖에 안 된 딸아이는 내가 주문한 가자미가 여자가 맞느냐고 재차 물었다. 그러면 내가 대신 아저씨에게, '삼촌 이거 여자 맞지요? 우리 애기가 알을 너무 좋아해서요.' 하고 물었고 아저씨는 아빠미소를 머금고 딸에게 '여자 맞아요. 맛있게 먹어요.' 했다. 


밥상에 오른 가자미 구이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알을 생선코너에 반듯하게 누운 가자미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도 딸아이는 가끔 영국 슈퍼마켓 냉장 진열대에 압축포장되어 있는 가자미 비스름한 서대기(sole)를 보면서 저것이 여자냐고 묻는다. 생물 생선코너가 따로 있는 슈퍼마켓이 드물어 '물을 데가 없어 모르겠다' 하고는 각자 이마트 생선코너를 떠올리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다. 


영국은 섬나라라서 사방이 바다임에도 해산물이 다양하지 않음에 늘 한탄한다. 영국의 대표적인 음식 '피시 앤드 칩스'를 만드는 생선은 대구나 그 비슷한 해덕(haddock)이 대부분이다. 왜인지 영국인들은 해산물을 요리하는 것에 겁을 내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다. 포장마차 단골메뉴인 홍합탕의 주인공 홍합을 일생에 한 번도 요리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스타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가 한탄하던 것이 기억난다. 영국의 대부분의 슈퍼마켓에서 생선을 살 때는 필렛으로 손질되어 진공포장이 된 것들을 산다. 간혹 통 생선도 있지만 대부분은 스테이크 형태나 필렛으로 손질되어 있다. 오징어나 문어, 게는 쉽게 볼 수 없고 새우나 조갯살은 예쁘게 손질되어 생물이나 냉동으로 판매된다. 


명절이나 특별한 날이면 아빠는 늘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셨다. 홍어회와 각종 회를 사 오셨다. 어려서는 회 맛을 몰라 어른들이 회를 드실 때면 옆에서 오징어 숙회나 찐 게를 먹곤 했었다. 부들부들하면서 쫄깃하고 고소한 막 삶은 오징어 숙회의 맛은 뇌 안의 기억 저장소에 커다란 자리를 잡고 있는 게 분명하다. 가끔씩 환장하게 그립다. 그럴 땐 아쉬운 대로 한국슈퍼에서 사 온 냉동 동해안 오징어가 출동한다. 물컹한 생물 오징어가 아니라 시체처럼 딱딱하게 굳은 몸이다. 어떤 날에는 해동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뻣뻣한 냉동 오징어를 팔팔 끓는 물에 욱여넣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이 오징어는 손질이 되지 않았음을 기억해 내고 이제 조금 몰캉해진 배를 갈라 내장을 제거한다. 그리고 빛의 속도로 초장을 만들어 혼자만의 천국을 만끽한다.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잘 살아가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는 조국의 맛이 떠오르면 그때부터는 전투모드 비슷하게 응급상황이 된다. 먹어야 해. 찾아야 해. 만들어 내야 해. 

아파트에서 슬리퍼 찍찍 끌고 걸어 나가면 있는 감자탕집. 깍두기가 맛있던 구수한 시래기 해장국집. 시장통에서 세숫대야처럼 큰 스테인리스그릇에 한가득 나오던 해물 칼국수와 수제비. 떡볶이 포장마차에서 홀짝이던 어묵국물.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던 순대와 간...


간. 그날은 갑자기 간이 먹고 싶었다. 순대도 아니고 간이 먹고 싶었다. 순대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냉동순대를 사려면 뉴몰든까지 나가야 하고 그마저도 실은 별로 맛이 없다. 이 나라도 간은 먹지 않을까. 다급하게 구글에 돼지 간을 검색하니 한 슈퍼마켓 체인에서 파는 것 같다. 응급상황이다. 간을 사러 달려 나갔다. 다행히 눈앞에 진공포장된 돼지 간이 있다. 한국에서는 구경도 못한 돼지의 생 간이다. 네이버에서 조리법을 찾아낸 뒤에 순식간에 만들어냈다. 내 DNA가 부르는 돼지 간의 맛. 울산에 사는 동안 배운 것은 순대와 간을 쌈장에 찍어 먹는 것이다. 양파를 다지고 고춧가루와 참기름을 더해서 쌈장을 만들어 간을 찍어 먹었다. 고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저렴한 가격의 간을 구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다음번에 또 돼지 간 소용돌이가 치면 그때는 당황하지 않고 금세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주부경력 17년 차. 영국생활 도합 9년 차. 이전과 비교하면 말도 안 되게 많은 것을 구할 수 있는 영국이고 나 또한 많은 것을 만들어 본 경험치가 쌓였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한국에서 쉽사리 외식으로 해결했던 많은 음식들을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다. 김치를 담그다 못해 판매까지 했으니 말 다했다. 명이 장아찌도 만들고 간장 게장도 만든다. 치킨도 만들고 치킨무도 만든다. 그런데 서럽지가 않다. 흥미롭고 신기하고 자부심마저 든다.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이면 다행이고 감사하다. 내 능력 밖에 있는 것을 갈구하는 비상사태만 생기지 않으면 된다. 생기면 또 어떠랴. 재빨리 대체음식을 준비하면 된다. 냉동실에 술떡도 한가득하니 당분간은 거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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