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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양 Jan 06. 2024

단상

아이들은 정말 어른의 거울이다.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거나, 종족번식을 위한 것이라고 일차적인 개념을 갖는 대신, 나는 아이를 낳아 키우는 과정이 인간이 인간답게 성숙할 수 있는 훈련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자식을 낳아야 어른이 된다는 흔한 말도 또 하나의 ’ 틀린 것 없는 옛말‘이다.


이제는 사십 줄에 접어 들어서 많이 유해지고 둥글둥글해졌다고 공언을 하며 살다가도 한 번씩 아이들에게 부모로서 ‘지혜로운 말’을 해 줘야 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면 내 앞에 억울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아이에서 나를 본다.


그러면 아이에게 해주는 말들은 결국 스스로에게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다. 정신 차려. 너도 똑같아.


어제 있었던 사소한 말다툼에 오늘까지도 남편을 보는 눈빛에 냉기를 머금은 나를 봐도 그렇고, 오랫동안 큰 아이에게 다정함을 잊은 채 가시옷을 입은 단어들을 내뱉었던 내 습관이 여전히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봐도 그렇다.



코로나 이전에도 나는 종종 아이들 머리를 잘라주었는데 오랜 시간 공들여 자른 결과물은 고객들이 만족할 만한 정도는 되었다. 그러다 이제 십 대가 된 아이들을 한인 미용실에 데려가 멋스럽게 층을 내어 잘라주었더니 큰아이는 역시 전문가의 손길에 감탄하며 좋아했다. 그런데 엄마의 일자컷팅에 익숙해진 둘째는 세련된 그 스타일이 싫었던 모양이다. 엄마가 잘라달라고 엄마의 머리가 더 좋다고 엊그제 둘째가 말했다.


전문가를 제치고 선택된 의기양양함이 잠시 나를 미용실 원장님으로 빙의시켰는가 보다. 고객이 원하는 어깨를 살짝 넘는 길이는 머리가 뻗칠 수가 있어서 더 길던지 짧아야 한다고,,, 말이라도 해줄 것을 혼자만 생각하고는 어깨 위로 머리를 잘라놓았던 것이다.


공들여 자르는 동안 거울을 등지고 있던 아이가 뒤를 돌아 거울을 본 순간, 아이의 두 눈에 만화처럼 느낌표가 생기는 것을 봤다. 충격과 공포의 순간에 등장하는 각지고 커다란 느낌표다.  그리고는 이내 입꼬리가 처지더니 말없이 샤워부스로 들어갔다.

‘싫은가?’


성당에 봉사를 나갈 시간이 되어 아이 방 문을 열었는데 둘째가 바닥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었다.

‘왜 그래? 머리가 맘에 안 들어? 너무 짧아?’

다독이고 위로하고 싶어도 시간이 바빠 어쩔 수 없이 벌떡 일어나 나섰는데 아이는 그것을 내가 화난 것으로 여겼나 보다. 성당 가는 길에 문자가 왔다.

‘엄마, 울어서 죄송해요.’


성당 점심 봉사 후에 모여서 식사도 하고 슈퍼에 들러 장도 보고 서너 시간 만에 돌아오니 둘째가 자기가 ‘오버 리액트’를 한 것 같다며 이제는 괜찮은 것 같다고 했다.


저녁을 만들어 놓고 큰 아이에게 치즈를 갈아 만들어 놓은 ‘칠리 콘 카네’ 위에 뿌려서 먹으라고 지시를 해 놓고 마지막 남은 드라마 한 편을 보고 있는데 둘째가 눈물을 글썽이며 방으로 들어왔다. 입을 열기도 전에 나는 알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기가 온종일을 들여서 겨우 진정을 했는데 종일 도서관과 알바를 가느라 이제야 머리를 본 언니가 비웃으며 놀렸다는 거다. 그만하라고 했는데도 계속 나쁘게 했다고 한다. 이런 걸 안 봐도 비디오라고 하나보다. 내가 깜박하고 큰아이에게 주의를 주지 않은 거다. 머리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말라고.



큰아이는 원래 굉장히 여리고 다정한 아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냉소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변했는데 아마도 사춘기라서 그렇지 싶다. 물론 모든 책임을 떠안을 생각은 없어도 내가 오랫동안 아이에게 화풀이를 하며 살았다는 데에 어느 정도 영향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했던 그대로 아이는 뾰족하게, 따갑고 아프게 동생에게 말을 한다. 카르마. 한 짓이 있어 나도 감내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동안 보아온 유튜브의 강연들과 자기 계발서를 비롯한 책들을 무기로 아이에게 일대일 강연을 한다. 내가 하는 말을 ‘lecture’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됐다.

’ 우리 엄마는 늘 ’lecture’를 해요 ‘라고 누군가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물론 여기서 렉처는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잔소리를 한다는 뜻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한다. 내가 가진 통제권은 내 마음뿐이라는 것에 대하여.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 생각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 그래서 내 생각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배우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자극에 대해 자동적으로 반응을 하지 말라고. 자극에 대한 통제권은 나에게 없어도 반응에 대한 통제권은 꼭 쥐고 있으라고.

‘네 마음의 리모컨을 상대의 손에 쥐어주지 마. 네 마음은 네 거야. 네 리모컨을 네가 꼭 지켜.‘로 마무리하며 꼭 안아주며 생각한다.

나도 어제 내 마음의 리모컨을 남편 손에 쥐어 주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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